[문학] 大家가 알아본 大家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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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 도토리 키 재기 하듯 아등바등 설쳐대는 녀석들도 꼴불견이고. 여기선 아무리 이름을 얻어봐야 고작 카탈루냐 화가야. 이대로 주저앉아 뜬구름 잡는 꿈만 꿀 게 아니라 우리도 파리로 들어가자고!’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피카소에게 말했다.”

소설가 김원일(62)씨가 10대 후반부터 가져 온 피카소에 대한 진득한 관심을 원없이 쏟아부은 단행본 『김원일의 피카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출신으로 궁핍했던 피카소와 달리 카사헤마스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학교를 다닌 친구다.

다음 장면에서 피카소는 잠시 멍해지며 자신의 작업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그림들이 갑자기 시들해 보이고, 파리로 가는 여비를 걱정하는가 하면 당시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파리에 대한 기대로 들뜬다.

김씨의 『…피카소』는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현대 미술의 이해에 이르는 길을 한참 돌아가게 되는, 피카소의 예술과 생애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수십년간 피카소 그림을 들여다보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온 김씨가 단순히 피카소의 천재성을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재성을 사장하지 않고 북돋아주었던 ‘배후’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배후는 피카소의 성격·환경·연인·친구 관계 등을 말한다. 김씨는 배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피카소의 정신적인 순발력에도 관심을 가졌다. 유전적 천재성을 포함한 피카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건드린 셈이다.

때문에 책에는 피카소 예술의 찬미자였던 막스 자코브와 거트루드 스타인, 예술적 영감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마티스와 브라크, 피카소의 여인이었던 마리 테레즈·도라 마르·프랑수와즈 질로 등의 이름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시콜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한다.

부친이 사회주의자로 월북한 개인사에 매달려 남북 분단 소설에 일가를 이룬 김씨의 예술적 식견과 통찰을 피카소의 경우에 견주는 대목도 흥미롭다.

가령 김씨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통해 처음 착상할 때와는 딴판인 완성품을 내곤 했던 피카소의 작업과정을 일반적인 소설 쓰기와 비교한다. 소설가도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과 사건의 진행이 최초의 의도와 목적을 배반하곤 하기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섭렵한 전기와 축적된 자료, 여기저기서 발췌한 피카소의 발언 등으로도 재구성할 수 없는 미묘한 대목들에서는 김씨의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됐다.

『…피카소』가 알기 쉽고 방대한 ‘피카소 평전’을 넘어서는 이유는 피카소 예술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이 전문적인 연구서는 아니다.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들이 던지는 까다로운 질문들에 정직하게 맞서 김씨가 고심 끝에 내놓은 찬찬한 대답들은 피카소 예술에 대한 든든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당대 동료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와 작품 사진,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 인상파로 넘어가는 미술사조 변천에 대한 설명 등 각주 형식으로 제공되는 정보들을 통해 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문화예술사로도 읽힌다. 피카소의 작품 사진 230여장이 실렸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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