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간장독에 가득한 보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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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봄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늘 아침은 맑은 공기와 밝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계절에 대한 감각이 무뎌서일까 장독대 옆의 대추나무는 지난달 말이 돼서야 새 순을 볼록이 내놓았다.
며칠 열어놓지 못했던 장독 뚜껑을 열어젖히고 들여다보니 짭조름한 향기의 햇간장 냄새와 함께 장물 위에 가득히 하얀 배꽃(?)이 넘실거린다.
지난해 초여름 1백여평 남짓 자투리 밭에 콩씨를 구해 뿌렸다.콩은 비료와 농약을 한번도 주지 않았는데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여름철 노란 콩잎 순을 따 물김치도 담가 먹고 콩잎장아찌도만들어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어느덧 보라색 콩 꽃이 피고 꽃물결을 이루더니 콩섬을 짓고 파란 가을하늘 아래 콩농사가 풍년이 되었다.콩으로 메주를 쑤어 말린 것을 정월달 손없는 날을 가려 정성들여 장을 담갔다.
산속의 약수를 길어다 약수 한말에 천일염 3되를 풀어놓고 잘씻은 메주를 정갈한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었다.풀어놓은 소금물을체에 걸러 붓고 불에 달군 참숯 두덩이와 붉은고추 서너개를 띄운뒤 대추와 참깨를 동동 띄웠다.그날부터 장항 아리 관리에 신경을 썼다.
별이 총총한 밤이면 뚜껑을 열어 이슬을 맞혔고 날씨가 맑아 따사로운 날에는 햇빛을 쐬었다.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장독 뚜껑을 꼭꼭 닫아 빗물을 조심했다.그러기를 40여일이 지난 오늘 아침 장독안에 배꽃이 만발한 것이다.
옛날 친정어머니는 장항아리 속에 배꽃 모양의 곰팡이가 피어야그해 간장맛이 제일 좋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슈퍼나 골목 가게마다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제품이 많지만 나는 아직도 장독대를 고집하고 있다.
「장맛이 좋아야 그 집안이 잘된다」는 옛말을 기억하며 스무번넘게 장담그기를 되풀이해왔다.장독안을 보며 경륜이 쌓인 나의 솜씨에 만족한 미소를 지어본다.
이제 맑은 날을 골라 장을 달여야겠다.
홍화자(부산시강서구대저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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