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無慾戰法'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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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홍구(李洪九)씨가 신한국당대표가 된 것을 보면 역시 정치란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당(黨)대표→대선주자를 노리는 인물들이수두룩한데 막상 대표가 된 사람은 『나는 야심이 없다』『나는 적격자가 아니다』고 말해 온 李씨였으니 정치에 있어 성취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과연 뭣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정치판은 양보.겸손과 같은 윤리.도덕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조직.세(勢).돈.대중적 인기…,이런 「실력」이 말을 하는 곳이다.그래서 권력이나 요직은 실력을 가진 사람의 차지가 되게 마련인데 李대표의 경우 그런 실력 면에서는 잠재적 경쟁자 누구보다도 뒤떨어졌음은 자타가 공인한다.그를 대표로 만든 것은 정치적 실력이 아니라 무욕(無慾).무(無)야심,또는 그렇게 보이는 처신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가 대표가 되려는욕심과 대선주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졌거 나 가졌다고 보였던들 그에게 대표자리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굳이 표현한다면 「무욕전법(無慾戰法)」이 거둔 승리라고 할까.
꼭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79년말 최규하(崔圭夏)씨가 대통령이된 것도 일종의 「無실력」의 승리사례라 할 수 있다.당시 호시탐탐하던 3金씨 누구도 그를 경쟁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저항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92년말의 1 4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와는 관계도 없고 야심도 없던 현승종(玄勝鍾)씨를 중립내각의 총리로 만든 것도 바로 그의 무욕.무야심이었다.
신임 李대표는 교수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지만 출세나 부(富)같은 데는 다소 초연한 듯한 탈속(脫俗)의 풍모가 있었다.보기에 따라 좀 게으른 것 같기도 하고,귀족적인 듯도 하고,어느 모로 보나 악착스러운 데는 없는 타입이었다.다시 말해 정치인에게 흔히 요구된다고 생각되는 집념.조직력.인기추구 같은 요소를그에게선 별로 볼 수 없었다.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통일원장관으로 시작된 그의 관운(官運)은 대통령특보.대사.통일부총리.
총리를 거쳐 오늘날 집권당 대표에 이르는 승승장구였다.그가 의도했든 안했든 그의 「무욕전법」은 지금까진 늘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가 비록 무욕이고 야심이 없다 하지만 그의 여러가지 장점은 그에게 또 어떤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 줄는지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다.얼마전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열린 「한국의 미래지도자」란 세미나에서 스칼라피노 교수는 한국의 미래 지도자 조건으로▶좋은 교육을 받고▶호전적 민족주의 대신에 국제문제를 다룰 수 있는 코스모폴리턴(세계인)적 성향을 가져야 하며▶북한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제시했다.같은 세미나에서 서울대 김광웅(金光雄)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CN N방송을 직접 볼 수있는 사람,과거 누구처럼 뉴스시간에 꼭 나와야 한다든지 중요한일도 아닌데 외국 순방에 나서는 일 같은 것을 하지 않을 사람을 조건으로 내세웠다.예일대박사요,정치학교수며 북한전문가인 李대표만큼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풍부한 조건의 구비와는 상관없이 당대표로 정치 한복판에 들어간 李대표에게 「무욕전법」이 계속 통할는 지는 의문이다. 실제 李대표가 무욕을 말하면서도 내심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당대표가 된 후에도 계속 무욕론(無慾論)으로만 나갈 경우 미래는 커녕 대표직의 성공적 수행도 어려워질 것이란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같이 일 할 당3역의 인선문제까지도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종전처럼 탈속한 풍모나 계속 보인다면 얼굴마담 대표.구색용 대표가되기 꼭 알맞을 뿐이다.
이제 당대표가 된 이상 대표라는 공인(公人)의 의무와 책임을다한다는 자세로 나가야 할 것이다.무욕하더라도 의욕과 책임감마저 없으면 안된다.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체중을 실어 개입하고,관여하고,주도해야 한다.李대표만한 사람이 어떤 문제든 모른다고 해서는 말이 안된다.알면서도 말을 피한다면 책임을 다 하는자세가 아니다.마른 땅만 밟을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불가피하게진 땅도 밟아야 한다면 그걸 피해서는 안된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에는 복잡한 일이 많을 것이다.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싫어해도 직언을 해야 하고,누구에게도 적(敵)이 되지 않는 자신의 강점(强點)도 더러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필요하면 과감하게 적도 만들 수밖에 없다.그렇게 나갈 때 그의 「무욕전법」은 그의 많은 장점과 어우러져 또한번 뜻밖의 성공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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