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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7. 장흥 보림사(寶林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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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크기도 당당하고 장식문양이 정교해 부도의 장자(長子)다운 기품과 근엄함이 살아있는 보조선사 창성탑.


장흥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째 개창 사찰이다. 대적광전 앞 국보 44호 쌍탑과 석등은 9세기 전형적인 양식으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기준이 되고 있다. [조용철 기자]

사실 나는 장흥 보림사에 무수히 다녀왔다. 20여년 전, 거의 폐사나 다름없을 때부터 비포장 흙길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보림사에 다녀왔고, 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면서 '남도의 산사를 찾아서' '9산선문의 호남4문 순례' '환상의 부도여행' 등 여러 주제로 답사를 다닐 때도 보림사는 빠진 적이 없었다.

한국미술사 내지 한국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9세기 하대신라의 문화를 말하면서 장흥 보림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무조건 엉터리 책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알다시피 9세기 하대신라는 문화의 중심이 경주(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는 호족발흥의 시기였으며 사상적으로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그 문화변동의 상징적 유물은 호족의 이미지를 닮은 철불의 등장이고, 대선사의 사리탑인 부도의 유행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삼층석탑과 석등의 장식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장흥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 번째 개창 사찰이고, 철조비로자나불, 보조선사의 부도 및 비석, 그리고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 모두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물들은 하나같이 절대연대를 갖고 있는 명작이어서 9세기 불교미술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보림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비문에 자세하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래 원표(元表)대사가 창건한 절로 체징이 당나라 유학 후 설악산 억성사의 염거화상 문하로 들어가 정진한 다음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이곳 가지산 보림사에 와 선종을 일으키니 여기는 오늘날에도 그 맥이 전해지는 가지산문의 본가이며, 도의선사, 염거화상, 보조체징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의 종가로 된 것이다. 그래서 9산선문 중에서도 제1가람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이다.

체징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보조라 내리고 그 사리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지어주며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했다. 그것이 지금 보물 157호와 158호로 지정된 보조선사의 부도와 비석이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씨는 무슨 사연에서인지 첫 행부터 7행 중간 선(禪)자까지는 김원(金)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에는 김언경(金彦卿)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 이런 비문은 세상에 다시없는 것이다.

보조선사 창성탑이라고 불리는 체징스님의 부도는 9세기 팔각당부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크기도 당당하고 장식문양이 정교하여 부도의 장자(長子)다운 기품과 근엄함이 살아있다.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은 일찍이 국보44호로 지정된 9세기 전형적인 양식으로 지붕돌의 곡선이 과장되고 연꽃무늬의 새김이 대단히 장식적이다. 특히 이 쌍탑과 석등은 상륜부가 완전하여 우리 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 중 보림사의 최고 명품은 뭐니뭐니해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117호)이다. 앉은키가 2.74m나 되니 그 장대함을 능히 알만한데 무쇠를 녹여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주조했다는 사실 자체로 당시 지방문화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 불상에는 왼쪽 팔꿈치 위쪽에 8행 60자에 이르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어 858년에 김수종(金遂宗)이 왕명을 받들어 1년에 걸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조선사비문에는 860년에 김언경이 주성했다고 되어 있어 이 해석을 두고 두 가지 설로 나뉘는데 하나는 김수종과 김언경이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고, 하나는 김언경이 공을 가로챈 소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장흥 보림사는 9세기 하대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을 갖고 있으니 장흥사람들이 나를 원망할 만한 일이다. 특히나 장흥사람들이 고향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다. 우선 장흥이라는 지명 자체가 고려 인종의 왕비가 장흥출신의 임씨인데 왕비의 소생 중 세 아들이 의종.명종.신종으로 이어지니 왕비의 고향이 길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내려진 곳이다.

장흥사람들이 장흥을 문림(文林)이라 일컫는 것도 괜한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은 거의 호남문단 차지였는데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을 비롯하여 장흥출신이 무려 25%나 차지하고 있다. 또 조선후기의 실학, 특히 지리학의 대가였던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98)도 장흥 출신으로 지금 장흥읍내에는 그의 동상을 우뚝 세워 여기가 문향임을 안팎으로 과시하고 있다.

또 장흥은 그 자연 풍광 자체가 넉넉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장흥을 답사하는데 탐진강 줄기가 이루어낸 부산평야가 풍요롭고 사방으로 둘러있는 억불산 천관산 사자산 제암산 산세들이 하나같이 준수하고 기이하여 오래도록 차창 밖에서 눈길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곁에 있던 장흥 출신 화가 김선두는 제암산의 철쭉과 천관산의 억새는 천하의 장관이라며 제 흥을 이기지 못해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장흥 답사기를 이제껏 쓰지 못한 것은 장흥의 동쪽 득량만을 가보지 못해서였다. 바지락 피조개 석화 꼬막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살아가는 장흥사람에게 이 갯벌은 풍요의 뻘밭일 것 같은데 한승원의 소설 '그 바다 끓며 넘치며'는 오히려 치열한 생존의 바다이자 들끓는 관능의 바다로 묘사되어 있다.

"득량만의 쪽빛 물굽이에 홑이불 자락처럼 자욱하게 덮이어 있던 안개덩어리가 동남풍에 밀려 응달의 해송 숲으로 거대한 원시 양서류처럼 기어오를 제면, 이 골짜기는 살아있는 암컷처럼 암내를 풍기곤 한다."

그 질퍽한 득량만의 바다내음이 내 발목을 붙잡아 놓은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응달개포라는 곳을 본 다음에 장흥답사기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홍준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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