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못 넘긴 반민특위 “건국에 필요한 인재라 … ” 친일 청산 논란 불씨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반민특위 습격 사건=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서울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하에 40여 명의 사복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데 이어 반민특위 특별조사위원과 조사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의 가택을 수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노덕술·최운하 등 주요 경찰 간부를 구속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반민특위의 기능은 급격히 무력화됐고 8월 31일 결국 특위는 해체됐다.

친일파 청산은 당시 최대 사회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의 높은 관심을 반영해 국회도 즉각 법을 만들고 반민특위를 구성했다. 그러나 한계도 뚜렷했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단순히 과거사를 정리하는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는 현재의 정치적 세력 관계와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무엇보다 정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이들이 대부분 당시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건국 정치’의 과정에서 명분과 실리의 괴리가 뚜렷했던 분야가 친일파 청산 문제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돼 법정으로 끌려가는 친일 혐의 인사들. [중앙포토]

◇불안한 출발=반민법은 48년 9월 7일 재석 의원 141, 가(可) 103, 부(否) 6으로 통과돼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됐다. 흔히 반민법은 압도적 찬성 속에 통과된 것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성균관대 정외과 김일영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재적의원 198명 중 141명만 참여했고, 141명 가운데 가·부를 제외한 32명은 무효 내지 기권표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불참자 57명, 무효 내지 기권 32명, 반대 6명을 합친 95명은 결국 반민법 통과를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103 대 93’이란 수치는 압도적인 통과로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불안한 출발은 곳곳에서 예감됐다. 반민법 심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9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담화를 내놨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9월 23일엔 서울운동장에서 내무부 주관 아래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 대통령의 축사가 낭독되고 이범석 국무총리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반민법은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11월엔 경찰이 고용한 전문 테러범에 의한 반민특위 요인 암살 음모가 폭로되기도 했다.

49년 1월 8일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을 체포하며 활동을 개시했다. “민족의 이름으로 반역자는 단죄된다. 친일 반역배 드디어 심판대에, 박흥식 드디어 수감!”(1월 11자 서울신문)이라는 격정적 보도도 보인다. 이어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이었던 최린,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그리고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등 저명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친일파’냐 ‘인재’냐=일제 때부터 고등계 형사로 악명 높던 노덕술 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의 체포는 사태 반전의 계기가 됐다. 노덕술이 체포된 다음날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등을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종용한다. 그래도 노덕술을 풀어주지 않자 이승만은 2월 2일자로 또 담화를 내놓는다. “좌익 분란분자들이 살인방화 등 지하공작을 하고 있어 경험 있는 경관의 기술이 필요한데 마구 잡아들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반민특위의 운명에 대한 불안한 예감은 49년 5∼6월을 지나며 절정에 달했다. 반민특위에 동조했던 무소속 소장 의원들이 남로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는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이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벌어진다. 그 와중에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6월 26일엔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터졌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됐다. 7월 6일엔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이 제출된다. 당초 공소시효는 50년 6월 20일까지였다. 결국 8월 31일 반민특위는 해체됐다.

친일 혐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신생국 건설에 긴요한 ‘인재’들이라는데 문제 해결의 어려움이 있었다. ‘친일파 청산’의 요구가 높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친일파 인재’가 건국 과정에 필요하다는 역설이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8개월간 682건의 친일행위를 조사해 영장 발부 408건, 검찰 송치 559건, 기소 221건을 기록했다. 이들 대부분은 풀려났고 재판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7건에 불과했다. 이 7명도 감형이나 형 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났다. 반민특위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강수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은 “친일파 청산은 단지 명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국가 건설의 중요 과제였다”며 “친일청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민특위는 국가 권력에 의해, 그리고 친일 세력과 그 비호세력에 의해 와해된 측면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반민특위의 좌절이 가져온 파장은 6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진다. 현대사 논쟁의 대표적 이슈가 여전히 친일파 문제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는 “인민들의 감정을 고려해 ‘형식적 처벌’과 ‘실질적 활용’을 조화시켰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예컨대 단기간 감옥을 보냈다가 나오면 활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또 정부에 등용할 경우 국장급 이상은 안 된다는 등의 원칙을 정했다면 국민 감정을 좀 달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신복룡 건국대 명예교수, 유영익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이강수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