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불교로 하나 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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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6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만난 진관스님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와 가야 등 4국의 불교사가 서로 회통할 때 불교 역사가 정확하고, 바르게 설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김성룡 기자]

“고구려 불교사를 알아야 고구려 역사가 보입니다.”

6일 서울 조계사 안의 찻집에서 진관(59)스님을 만났다. 늘 까만 승복에 황색 가사를 걸치는 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민주화운동 승려’로 통한다. 그런데 최근 묵직한 책을 한 권 내놓았다. 제목이 『고구려 시대의 불교수용사 연구』(경서원, 650쪽, 3만5000원)다. 다소 뜻밖이다.

“주위에서 ‘대필이 아니냐?’고 다들 물어요. 항상 사회운동하면서 언제 책을 썼느냐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3년이 걸렸어요.”

진관스님은 두 손가락을 주로 쓰는 이른바 ‘독수리 타법’이다. 매일 새벽, 그는 불교인권위원회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원고를 썼다고 한다. “새벽 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늘 작업을 했어요. 그건 사무실 직원들이 다 알죠. 잠은 낮에 짬이 날 때마다 토막잠을 잤어요. 그렇게 3년을 했더니 어깨가 결리더군요.”

문장도 깔끔하고, 분량도 만만찮다. 알고 보니 스님은 198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그것도 출가 후에 말이다. “문예창작과에선 희곡을 전공했죠. 불교의 경전이 사실 ‘희곡’이거든요. 부처님과 제자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적은 것이 바로 ‘불교 경전’이니까요. 그래서 언젠가는 불교 경전을 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건 저의 오랜 꿈이죠.”

사실 신라 불교와 백제 불교는 귀에 익숙하다. 그런데 ‘고구려 불교’는 왠지 낯설다. 스님은 왜 고구려 불교를 연구했을까.

“통상 불교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들어왔다고 하죠. 그런데 소수림왕 때는 불교가 들어온 게 아니라 공인된 겁니다. 그러니 그 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왔다는 거죠. 그리고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할 때는 이미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었겠죠. 고구려 불교를 연구한 것은 우리 불교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죠.”

스님은 고구려 불교사 연구가 일종의 ‘전초전’이라고 했다. “고구려 불교사를 연구한 뒤에는 가락(가야) 불교사를 연구코자 합니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가락국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설이 있거든요. 바다를 통해 인도에서 곧장 말이죠. 그럼 우리의 불교 역사는 1700년이 아니라, 2000년이 되는 거죠.”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사’는 쟁점의 한가운데 서있다. 진관스님은 “고구려사와 고구려 불교사는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그런데 불교계는 고구려사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죠. 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고구려 불교사를 들여다 보는 건 참 아쉬움이 많아요. 후대의 정치적 입장에 의해 고구려사가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진관스님은 동국대 행정대학원 북한학과에서 석사 학위(통일정책 전공)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고구려땅=지금의 북한땅’이란 인식도 고구려사 연구의 적지 않은 장애물이 돼왔죠. 북한에 비해 남한의 고구려사 연구가 미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고구려사 연구’를 위한 남·북한 학계의 협력과 연구 성과에 대한 공유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진관스님은 이번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도 연구의 발판으로 삼았다. “신채호 선생은 승려 생활도 했죠. 아들을 낳은 이듬해인 마흔네 살 때 승려가 되기도 했어요.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뿐 아니라 참다운 삶의 행복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던 거겠죠. 그가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사망했을 때,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른 이도 만해 한용운 선사였죠.”

진관스님은 고구려의 불교를 한 마디로 ‘국가 불교’라고 했다. 사회의 맨 밑에서, 맨 위까지 ‘불교’로 하나가 됐던 고구려라는 거다.

“광개토대왕 때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지었죠. 그리고 아들인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를 했어요. 불교는 고구려를 떠받치는 국가 이념이었죠. 을지문덕 장군이 30만의 병력으로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친 바탕에는 불교의 힘이 컸어요.” 진관스님은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역사를 버리고선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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