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舊시대 정치의 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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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선거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다.아무리 뛰어난 예지를 지닌 선각자나 과학적 분석력을 동원하는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미처 읽지 못하는 시대정신을 유권자는 표로써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이점이 바로 유권자의 위대함이고 대의민주주의의 장처(長處)다.이번 선거의 결과도 바로 이런 유권자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경우중 하나다.누구도 지금처럼 여당의 정국주도권을 확보해주면서 동시에 야당의 견제권을 보호해 주는 일종의 「황금분할」이 이뤄지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 다.
여당이 상대적인 약진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를 사실상의 대통령선거로 이해했다는데에 있다.이는 뚜렷한 대권주자가 없는 민주당이나 무소속이 고전한 반면 차기 대권주자를 영입함으로써 사실상 미래형 대권주자 가 출전한 신한국당이 선전하고,분명한 대권주자를 지니고 있는 국민회의나 자민련이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대권주자로 점쳐지는 인사들의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정서가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가장 큰 투표결정요인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따라서 이번 선거는 이회창(李會昌).박찬종(朴燦鍾)으로 대표되는 신한국당의 차기 대권후보가노회한 DJ.JP와 가상 대선을 치른 셈이 된다.
그런데 결과는 3金시대의 청산을 외쳐온 이회창.박찬종의 상대적 약진이며 구시대 정치의 상징처럼 돼 있는 DJ와 JP의 힘든 자기방어였다.지역정서에 의한 편향성이 비교적 덜한 수도권 지역에서는 기성정치권에 오래 머물러 있던 중진정치 인들이 대거탈락하는 가운데 신진정치인들의 선전이 눈부셨다.기성정치에 대한반감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여망이 이번 선거의 향배를 결정짓는가장 큰 변수였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정치도 변할 때가 됐고 그런만큼 좀 바꿔보자는 욕구가 3金씨에 대한 반란과 함께 새로운 대안에 대한 절절한 염원으로 나타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여당에 대한 지지는 현재의 집권세력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개혁성과에 대한 보답이라기보다미래의 정치행태에 대한 기대 표현이며 일종의 정치적 입도선매(立稻先賣)인 셈이다.
이렇듯 구시대 정치가 철퇴를 맞아야 했던 원인중엔 야당이 보여준 무사안일주의와 총선에 임하는 전략상의 실패도 들어 있다.
무엇보다 쟁점없는 선거전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점이 야당에겐 뼈아픈 패착이었다.지역정서와 스러져가는 구시대 정치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매달려 변화하는 민심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창의력과탄력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여당이 미래를 말하고 있을 때 야당은 과거의 평가에 매달려 있었으며 지역적 편향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보다 참신한 후보의 발굴이 요구되는 수도권지역에서도 그다지 열성적인 자기변신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새로운 전국구의석 배분방식을 염두에 두고 세 야당이 모두 전국에 걸쳐 공천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야당성향의 표를 크게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여당의 어부지리를 부추기는 셈이 됐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총선결과의 메시지는 이제 구시대 정치는 정리하자는 것이다.아니 구시대 정치는 이번 선거로 정리됐다.앞으로의 정국주도권을 다시 위임받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에 따라서는 충분히 구시대 정치를 탈피하 고 새로운 정치의 원형을 개발해 착근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적 조건이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대통령에게 백지수표를 내주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번 선거의 절묘한 점이다.집권여당이 총선결과가 시사해주는 바와 같이 개혁과 변화의 길로 착실히 전진해 나가지않는다면 언제든지 여당은 권력 재창출에 실패할 수도 있도록 돼있다.권력의 오만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선거가 보여주는 궁극적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박재창 숙대교수.의회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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