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이 뭔지, 지방대생은 서류 통과도 별 따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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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20면

최정동기자

ARS 합격 통보 시스템. 수화기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OOO님은 불합격이십니다. 다시 들으시려면….” 눈을 감았다. 부모님과 열 살 어린 동생의 얼굴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학교 강의가 끝나는 오후 5시면 학원으로 직행, 주말에 친구 만날 틈도 없이 편입학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 응시했던 다섯 개 대학으로부터 모두 불합격 통보를 받은 겨울이었다.

<2> 편입 ‘재수’하는 지방대생

서울 대방동의 한 편입학원에서 만난 충남 소재 대학의 영문과 3학년 박은호(25·사진)씨는 올 2월 편입시험에서 낙방한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박씨가 편입 준비에 뛰어든 건 지난해 2월. 친하게 지내던 학우 세 명이 모두 정규직 취업에 실패하고 박봉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결심을 하게 됐다.지방대 졸업장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박씨는 학교 수업 틈틈이 대학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주말엔 하루 여섯 시간씩 학원에서 보냈다. 하지만 편입학 시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몇몇 대학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70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곳도 있었다.

올 3월 박씨는 어머니와 의논 뒤 휴학을 결정했다. 다시 한번 편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에 떨어졌을 땐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이제 휴학도 했으니까 지난해와는 또 다르죠. 다시 한번 해 보려고요, 이번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란 생각으로….”이미 대입 과정에서 재수를 감행한 박씨에게 또 한번의 편입 재수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회 진출 시기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한 또래보다 2년 이상 늦어지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합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박씨의 졸업연도는 2011년 2월. 이미 28세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주변에서 지방대 졸업장으로는 서류전형 통과하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휴학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빨리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경력을 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지금 다니는 대학 졸업장으로 안정된 직장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붙기만 하면 아버지도 이해해 주시겠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합격한다는 생각뿐이에요.”박씨가 다니는 대방역 근처 편입학원의 총 수강생은 600여 명. 매일 오전 5시면 자습실 자리를 맡으려는 긴 줄로 학원 앞은 북적거린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편입학에 매달리는 것 같으냐”고 묻자 박씨는 “다 학벌 때문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편입 준비생들은 경영학·경제학·영문학 등 취업에 유리한 학과로 몰린다.

취업 전망대 이우곤 대표

기업에서 선호하는 인기 대학·학과들은 편입학 전형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지난해 고려대 안암캠퍼스의 경우 경영대는 81.75대 1, 영문학과는 91.33대 1이었다. 점점 높아져만 가는 기업의 입사 경쟁률도 박씨를 불안하게 만든다.취업·인사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올 상반기 공채를 실시한 11개 주요 그룹의 입사 평균 경쟁률은 33.5대 1을 기록했다. 이 중에는 10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그룹(GS그룹)도 있었다. 금융권 취업을 희망하는 박씨의 경우 최대 139.5대 1의 경쟁률(외환은행)을 뚫어야 한다.

해마다 치솟는 편입학 경쟁률과 입사 경쟁률. 박씨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하지만 그는 감상에 젖어들 여유 따윈 없다고 말한다. “갈수록 현실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고민한다고 경쟁률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편입에 성공할까, 이러다 실패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제겐 사치예요. 그런 고민할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봐야죠.”학원 문이 열리는 오전 6시30분부터 문을 닫는 오후 10시까지, 오늘도 박씨는 자습실 한편에서 편입 준비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세요
최근 면접 현장을 가보면, 휴학기간이 2년 정도 되는 지원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취업을 위해 인턴이나 해외연수 등의 경력을 쌓은 때문입니다.

은호씨는 재수와 편입 준비란 2년의 공백기간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경력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최근 토익 성적도 전체적으로 상향돼 있기 때문에 편입 준비를 위해 따놓은 점수도 그다지 효력이 없을 듯합니다. 편입에 성공하든 아니면 원래 대학으로 돌아가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입니다.

왜 대학 편입을 하려는 것인지, 그 이후엔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 대학 편입에서 면접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에 면접관에게 분명한 목적의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편입 준비의 시간을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열정을 익힌다는 각오로 ‘무쏘의 뿔’처럼 흔들림 없이 달려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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