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소통? 꿈 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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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07면

일러스트 강일구

한때 SBS-TV 예능 프로 ‘야심만만’을 보면서 말 그대로 하루의 피로를 싹 씻어 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상한 직장에서 한심한 인간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늘 투덜대던 무렵이다. 꽉꽉 눌린 스트레스를 안고 집에 돌아와 드라마 줄거리 따라갈 에너지조차 없을 때 한밤중에 머리를 텅 비우고 입을 헤 벌린 채 긴장을 확 풀어 버리게 만드는 게 ‘야심만만’이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당시 ‘야심만만’의 키워드는 ‘공감’과 ‘소통’이었다.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사랑이나 연애를 위주로 한 설문 순위 맞추기 코너는 바로 대중의 공감 순위였다. 딴 세상 사람 같은 연예인들이 나와 평범한 사람들이 쏟아내는 공감의 답안지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리며 정답을 내놓고 틀리면 곱게 넘겨 빗은 머리가 휘날리도록 센 바람을 맞는 것이 약간 통쾌했다.

그런 흐트러진 모습과 함께 자신도 거기에 공감하는 경험이 있었노라며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들이 펼쳐지면서 보는 사람은 그들과 내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기쁨을 느꼈다. MT 때 촛불 켜 놓고 하는 진실게임처럼 ‘야심만만’에서는 진실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거기에 여학생의 일기장 글귀 같은 강호동·김제동의 닭살 명언들 역시 낯간지럽지만 그래도 ‘맞아 맞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소통불가의 현실에서 고단하던 내 마음이 화면 속의 공감과 소통으로 위로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야심만만-예능 선수촌’은 오락프로에서 공감이나 소통을 따지는 한가한 시대가 아니라며 “꿈 깨!”라고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었다. 강호동·김제동·윤종신에 MC몽·전진·서인영, 거기에 최고의 게스트 이효리·장근석까지. 속된 말로 ‘잘나간다’는 연예인을 죄다 모아 놓은 데다 말할 기회를 얻으려고 발버둥치며 서로를 깎아내리는 모습조차 요즘 토크 프로그램들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전엔 커다란 테이블 주위에 붙박이처럼 의자에 앉아 이야기만 하던 그 분위기 때문에 출연자들의 솔직한 에피소드들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낮아진 테이블과 여유 있어진 스튜디오가 요란한 섹시 댄스의 경연장처럼 돌변하며 산만해졌다.

무슨 말 한마디만 나오면 출연자 입이나 자막에서는 그의 “예능감”이라는 본데없는 말로 자신들의 업계 생존 능력을 평가하며 즐거워한다. 최고의 게스트라는 이효리는 그에 걸맞게 시청률이 떨어져 고생했던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까지 보였다. 이것이 최강 MC, 최신 트렌드, 최적 에피소드, 최고 댄스 경연장을 결합한 잘나가는 ‘예능’ 쇼의 백화점식 구성이다. 그렇지만 지친 하루를 달래 주던 공감과 소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까. 공감의 말로 위로받기보다 서로가 얼마나 험한 서바이벌 경쟁세계에서 사는지 확인하느라 난리다. 그래서 서로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열심히 흔들어 대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 저 사람들도 저렇게 의미 없이 소비되는데 나 정도야” 하는 식의 자조로 화면 밖 세계의 답답함을 위로받는 시대인가보다.

살벌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에 쏟아지는 이런 최신 트렌드의 오락쇼들을 여전히 입을 헤 벌리고 보기는 하지만, 그 뒷맛은 이전에 비하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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