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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60주년] 북한에선 민족주의 계열 조만식 몰락…소비에트 정권 수립 본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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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치고 피압박 민족의 한을 자주독립 국가로 풀어야지요. 이 모든 것을 위해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돼야 합니다.”

조선민주당 당수였던 조만식(사진)은 1945년 8월 29일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를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뜻을 강력히 폈다. 이는 자신들의 안보, 미국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북한을 소비에트화하려던 소련군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조만식의 뜻은 바뀌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12월 30일 신탁 문제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그는 갈등 속의 협조자 관계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소련 군정이 북한 지역을 찬탁 분위기로 몰아가자 민족주의 계열의 반발은 거셌다. 소련 군정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제”라는 입장으로 조만식을 설득했다. 또 제자인 최용건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당시 조만식은 서울과 교감을 가지며 반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반탁을 주장하던 남한의 공산당까지 찬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북한 내 민족 계열의 입지는 점차 좁아져 갔다. 결국 46년 1월 3일 평양에서 찬탁시위가 열리고 민족 계열과 소련군정은 결별 수순을 밟았다. 소련군정은 조만식을 평양호텔에 연금시키고 조선민주당을 압박했다. 신탁통치 문제는 결국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북한 지역에서 우파가 몰락하고,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했지만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 북한에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섰다. 토지 개혁, 남녀평등법령, 노동법령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화가 착착 추진되고 있었다.

48년 작성된 북한 주재 소련 민정부의 사업 결산보고서는 “조선 문제에 대한 소련의 실질적인 원조와 사심 없는 정책의 결과로 지난 3년간 북조선 인민들은 전 지역에서 눈부신 ‘민주 개혁’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3년간 소비에트화가 성과적으로 진행됐다는 뜻이다.

결국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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