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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권교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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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 에피소드는 며칠 지나 영국 언론에 보도됐다. 농담을 즐겨 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급했으면…” 하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다. 단 두 사람, 브라운 부부만은 웃고 넘기기 어려웠다. 그 무렵 영국 언론에는 블레어의 부인 셰리가 남편에게 브라운을 쫓아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브라운 부부로서는 블레어가 언론을 이용해 자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던 것이다. 브라운은 총리에 취임하기 직전 이런 몇 건의 일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돼버렸다. 물론 블레어에 대해서도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웃으며 악수는 했지만 두 사람의 교대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오랜 정치적 동지이기에 더욱 그랬다.

프랑스의 좌파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우파의 자크 시라크는 오랜 라이벌이었다. 특히 두 사람은 1986년 프랑스의 첫 동거 내각인 미테랑 대통령-시라크 총리 체제를 이루면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미테랑 재임 14년 중 시라크가 총리를 맡았던 2년여가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러나 95년 시라크가 엘리제궁에서 미테랑을 떠나보내며 손을 흔든 뒤론 그뿐이었다. 불편한 감정을 마음속에서 지우지는 못했겠지만 최소한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전·후임 대통령 간에는 불문율이 있다. 서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엘리제궁에서 전임자가 신임 대통령에게 취임 당일 핵코드를 넘겨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정권이 바뀌든, 같은 정당으로 이어지건 마찬가지다.

지난해 니콜라 사르코지는 시라크로부터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당 소속이었지만 불편한 관계였다. 사르코지가 지난해 여당의 대선 후보로 추대되던 날 시라크 당시 대통령이 사르코지에게 화환 하나 보내지 않았을 정도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건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라크의 힘을 업고 정계에 입문한 사르코지가 당시 시라크보다 인기가 많던 같은 우파의 에두아르 발라뒤르 진영에 들어가면서였다. 시라크는 ‘배신자’ 사르코지를 철저히 외면했고 사르코지 역시 시라크에게 서운한 감정이 컸다. 그러나 사르코지가 당선된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프랑스의 한 정치 전문기자는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나.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런 행동이 신사답지 못한 정치인으로 남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프랑스의 정치문화를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가기록 유출 논란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선 책임은 슬그머니 자료를 빼내간 쪽에 있을 것이다.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고도 되레 현 정부를 비난하는 행태에 다시 한번 지난 5년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러나 연일 전임 대통령을 몰아세우는 지금의 청와대도 그리 신사답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유출된 자료가 문제라면 회수하면 그만이다. 목적이 전임 대통령을 창피 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더 이상 멋대로 헌법을 뜯어고치며 임기를 연장하려는 대통령은 나오지 않게 됐다. 가슴 졸이며 바라던 평화적 정권교체가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도 평화적 정권교체뿐 아니라 전·후임 간의 ‘아름다운 정권교체’를 보고 싶다. 신사답고 멋스러운 정치가 그립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