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민감부분 삭제된 미국비밀문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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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말 3천여 쪽에 이르는 미 국무부의 광주 민주화 운동관련 비밀해제 문건이 공개돼 한차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미국 신문 「저널 오브 커머스」의 팀 셔로크 기자가 정보공개법에의거,수년 전 신청한 문서들을 비로소 입수해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논란이었다.
우리 언론은 당시 경쟁적으로 동일 문건을 국무부측에 요구했고이번 주에야 이를 입수해 또 다시 경쟁적으로 기사 거리를 찾기시작했다.
3천여 쪽의 문건을 접한 기자도 이 문건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바다 건너 본국에서는 이 문건을 최근까지도 한.미 양국 정부가 감추고 있던 많은 비밀이 여기 저기 숨어 있는 「자료의 보고(寶庫)」인 양 생각하는 「 정보 수요(需要)」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건을 읽어 본 후의 소감은 마치 볼 것 없는 영화를보고 나온 느낌이었다.또 지난 89년 미 국무부가 이미 공식 발표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백서(白書)의 내용도 다시 떠올랐다.당시 기대보다 훨씬 상세히 미 정부의 입장 을 설명했던 백서 이상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자연히 다음과 같은 자괴심(自愧心)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우리는 「못믿을 미국」을 부각시킬 수 있는 대목을 찾아내는 데 열을 올리고,일그러진 우리 역사상의 잘못에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것은 아닌지.
이번에 공개된 문건들도 비록 비밀 해제된 것이라곤 하지만 민감한 부분은 예외없이 삭제된 뒤 배포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매도할 짜릿한 부분을 찾아낼 수 없어 안타깝게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80년 당시 상황을 안이하게 평가하며 한국 지도부의 무능력과 자국민들을 상대로한 일부 군인들의 잔인함에 놀라면서도어쩔 수 없이 현실을 추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미국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 때만이 아니라 이란 인질 사태,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을 두고도 민주화를 앞세울 여력이 없었던 것이미국 외교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서도 그와 같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길정우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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