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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中·러 전문가 4人, 4.15 총선 이렇게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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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국.일본.중국과 러시아 전문가들이 4.15 총선에 대한 소감을 보내왔다. 총선에서 나타난 한국인들의 '창조적 파괴'와 '균형 감각'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남북 관계에도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 정치가 당분간 조정기를 거칠 것이며 한.미동맹에 긴장이 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정리=워싱턴.도쿄.베이징.모스크바=김종혁.김현기.유광종.유철종 특파원

*** 美 피터 벡, 관행 털어낸 '창조적 파괴'

4.15 총선에선 '창조적 파괴현상'이 나타났다. 낡은 정치시스템과 관행들은 거부됐고, 구정치인들은 젊은 정치인들로 상당수 교체됐다. 선거법 위반이 2000년 총선 때에 비해 두배나 늘었다는 보도는 오히려 희망적이다. 선거법이 강화되고 감시가 철저해 위반건수는 늘었지만 선거현장은 어느 때보다 깨끗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탄핵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盧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승리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패배는 아니라는 게 이번 선거의 묘미다. 盧대통령 탄핵 이후 개헌 저지선 확보가 위태롭던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어 몇년 후의 대선까지를 고려하면 '의미있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번에도 각 당의 정책적 차이가 거의 없어 아쉬웠다. 열린우리당은 '탄핵세력 심판'을 외쳤고, 한나라당은 '거대 여당 견제론'을 폈지만 구체적인 정책비전을 찾기 어려웠다.

열린우리당은 새롭게 탄생한 거대 정당이고 보스 정치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최초의 정당이다. 하지만 당내엔 진보와 보수가 혼재돼 있고, 정체성이 뭔지도 헷갈린다. 당장은 승리에 뒤따르는 낙관주의로 극복해 가겠지만 시간이 가면 당내 지휘계통이 제대로 서지 않고, 정체성 갈등이 발생해 분열을 경험할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은 또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커다란 짐을 안게 됐다. 유권자들은 열린우리당에 "새 정치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쉬운 목표가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미국 내 한국 전문가들은 열린우리당이 더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방향으로 치달아 한.미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 이후 과감하게 중도적인 정책을 펴나갔듯이 열린우리당이 중간노선과 현실주의를 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지역구도를 깨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이번에는 북풍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1996년 4월 총선 때는 판문점 부근에서 북한군이 박격포를 쐈고, 2000년 총선 때는 6.15 정상회담 발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한국경제연구소(KEI) 선임연구원

*** 日 고하리 스스무 (小針進), 유권자 균형감각 돋보여

이번 선거 결과의 두드러진 특징은 한국 유권자의 균형감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탄핵은 심했다"는 균형감각이 열린우리당에 단독 과반수를 안겨줬다. 또 "'차떼기당'은 지지할 수 없지만 견제세력으로서의 제2당은 필요하다"는 균형감각도 한나라당의 선전을 가져왔다.

한나라당이 선거과정에서 지지율을 회복하며 121석에 도달한 것은 '박풍(朴風)''노풍(老風)'때문이라기보다 '엄살 유세'에 의한 견제심리 효과였다. 마찬가지로 열린우리당이 대승한 것도 정동영 의장 등의 엄살 행위가 젊은 유권자를 재결집했기 때문이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 전의 여론조사 결과만 기억하고 있는 유권자들은 '엄살 효과'로 착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본래 있어야 할 정책 대결의 장애요인이 됐다. 따라서 공식 선거운동 기간 중의 여론조사 결과 공표 금지를 앞으로는 일본처럼 풀어버리는 게 나을 듯하다.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확보는 盧대통령의 재신임을 의미한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에 대한 최종 심판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기존 지역주의의 양상이 많이 사라진 대신 이념 대립과 그에 따른 국론 분열을 초래할 위험성도 생겼다.

앞으로 정부.여당의 법안 등은 국회에서 안정적으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금강산 관광에 공적자금을 끌어들이는 정부의 제안이 과반수를 쥐고 있던 한나라당의 반대로 중단된 적이 있었지만 앞으론 이런 법안이 통과되기 쉬워질 것이다.

남북 국회회담 제안 등 열린우리당은 남북 대화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일본 정부와 '온도차'를 야기할 것이다. 최근 일본 자민당은 '특정선박 입항 금지법안'을 추진하는 등 북한에 대한 제재에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또 북핵 문제와 관련해 열린우리당.민노당으로부터 '폐기''체제 보장'의 동시진행과 '동결'단계에서의 지원, 나아가 '폐기'를 유도하기 위한 사전지원 등 기존 한국 정부 입장과는 다른 의견이 불거져 나올지 모른다. "에너지 지원엔 남북 분단에 책임이 있는 미국과 일본도 자금을 분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시즈오카 현립대 조교수

*** 中 양보장 (楊伯江), 진보 의원 진출…韓.美 동맹 변수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해 노무현 정부의 정책 집행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북핵 문제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제3차 6자회담의 재개나 실무그룹의 출범 문제, 나아가 이를 전체적으로 뒷받침하는 한국의 북한지원 문제 등에서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대북 화합정책을 취하고 있는 현 정부와 국회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관계도 관찰 대상이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의 동맹이 굳건하게 이어져 왔지만 개혁 성향을 보이고 있는 현 정부와 국회에 진출한 새 세대의 진보 성향 의원들이 이를 어떻게 유지하고 변화시킬지 주목거리다. 남북 관계는 안정적으로 발전하겠지만 젊고 진보적인 성향의 의원들은 한.미 동맹 라인에 새로운 변수가 될 것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도 다소의 변동이 생길지 모른다. 파병 자체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겠지만 파병 인원과 형식, 파병 예정지 등에 대해 진보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새로운 여론을 형성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어쨌든 이 같은 사태 변화는 한.미 동맹을 또다시 시험할 수 있다.

중국 현대국제관계연구소 동북아연구실 주임

*** 러 콘스탄틴 아스몰로프, 核.경협 등 對北관계 탄력 받을 것

17대 총선의 가장 큰 성과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꼽을 수 있다. 한국 사회가 다양성을 포용할 정도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 문화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가 여전히 주요 정당의 득표에 적잖은 역할을 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당의 총선 승리로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위기 탈출과 안정적 국정 운영을 위한 강력한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끄는 정부는 향후 국정 운영에서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도 떠안게 됐다. 집권 초기 국정 혼란을 야당과 보수세력의 방해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던 정부는 이제 비난의 대상을 잃게 됐다. 현 정권의 지도력과 가치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盧대통령은 앞으로 강력한 개혁정책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탄핵의 주역인 구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와 개혁 입법 추진이 본격화할 것이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도 한층 활성화할 것이다. 남북 경협 사업도 새로운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북핵 문제 해결에서 한국 정부는 보다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 할 것이다.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학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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