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약자엔 절절한 연민 강자엔 끝없는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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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요즘 책의 크기가 너무 크다. 손가방이나 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전철 안에서나, 공원의 벤치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 그립다. 중·고생 시절의 삼중당 문고가 조금 더 큰 책이었다면 내 인생은 약간 바뀌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본 적도 있다. 문지 스펙트럼의 책들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문고의 외국 문학선 속에 칼 위스망스의 단편집 『궁지』가 있다.

위스망스는 졸라와 함께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소설가다. 1848년, 하필이면 혁명이 일어난 2월에 태어난 그는 민중들이 피로써 얻어낸 혁명의 성과를 부르주아들이 가로채버린 시기를 살아야 했다. 파리 코뮌마저 무너진 프랑스에 그러나 졸라나 발레리, 말라르메, 그리고 우리가 불문학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위스망스는 이 시대를 통과하면서 자연주의를 지나 악마주의까지 내려간다. 악마 숭배 미사를 드리는 등 끝까지 절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나폴레옹 3세가 일으킨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대해 그는 소설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직업을 찾으면서 나를 탐색하고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황제가 나에게 한 직업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의 서툰 정치적 행동으로 나를 병사로 만들어 버렸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터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군인들의 대학살을 필요로 하는 전쟁의 발발 동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필연성도 그들에 의해 내가 살해당하는 필연성도.”(‘등짐’ 중)

이 작품은 당시 우파들로부터 애국심이 결여된 소설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의 책은 풍속을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압수당한다. ‘부그랑씨의 퇴직’ 같은 작품은 현대에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다. 하루아침에 퇴직당한 공무원의 죽음을 다룬 이 작품에서 위스망스는 남이 짜놓은 틀 안에서 평생을 순응하던 한 인간이 그 틀에서 강제로 쫓겨났을 때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이에게 고독은 그야말로 죽음의 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궁지’라는 작품은 그 스스로 “부르주아 계급의 참을 수 없는 탐욕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명명한 소설이다. 위스망스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쌍한 여인들, 매춘부들을 향한 연민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부르주아들은 머뭇거리는 자들, 진실이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들, 증명서류를 갖추어 놓지 않는 이들, 인간의 상식과 선을 믿는 이들을 가차없이 공격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낸다.

위스망스는 자연주의·퇴폐주의·악마주의를 거쳐 40대 이후 가톨릭에 귀의한다. 종교는 그런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의혹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그가 편력한 이 모든 정신의 공통점은 어차피 그 모두가 약자에게 연민을 보내며 강자에게 저항한다는 것이니 이상할 것도 실은 없다. 토마스 만 식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것의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작가란 엄혹한 시대를 거치면서 가지가지로 불행해지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었다. 퇴폐에도 악마에도, 그리고 가톨릭에도. 그리하여 그는 시인 마종기 식으로 “목숨을 걸면 무엇이든 무섭고 아름답다” 는 인식에 도달한다. 가끔 대부분은 불행으로 점철된 선배 작가들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전진할 것, 약하고 소수이며 때로는 멸시받을지라도 인간 정신의 진보를 믿을 것…. 그 시대의 권력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그들과 타협하지 말 것…. 그리고 쓸 것, 그리하여 다만 희망을 절망처럼 간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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