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굴뚝’에 상상력 덧붙이면 달러·일자리 낳는 성장엔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태국 방콕의 범룽랏 병원은 의료서비스에 전통적인 관광산업을 결합해 한 해 100만여 명의 외래환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 중 절반가량이 19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환자다. 사진은 특급호텔을 연상시키는 1층 로비에서 환자들이 인터넷을 즐기고 있는 모습. [범룽랏 병원 제공]

‘미래 신성장 동력 산업=첨단 기술 산업’이란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반도체나 정보기술(IT)·바이오 같은 말이 들어가야 장래를 책임질 산업으로 여기는 건 오산이란 이야기다.

서강대 노부호(경영학) 교수는 “굴뚝 산업이라도 우리의 장기인 IT를 접목해 디지털화하고 업종 간 벽을 허물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융합·복합의 묘(妙)를 잘 살리면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통산업에 IT·문화·관광 등의 서비스업을 결합하면 이른바 ‘신성장 동력 산업’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근한 사례로 의료·관광 산업을 융합해 성공을 거둔 태국을 들 수 있다. 방콕의 범룽랏 병원 1층 로비는 성대한 국제행사를 치르는 특급호텔을 연상시킨다. 흰색 터번과 검정색 히잡을 둘러쓴 아랍인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왔다는 청바지 차림의 중년 부부 등 세계 각국의 환자로 종일 북적거린다. 이 병원을 찾는 외래환자는 한 해 100만여 명. 이 중 절반 가까운 43만여 명이 태국이 아닌 190여 개국에서 왔다. 범룽랏은 영어·한국어 등 17개 언어 통역사가 24시간 대기한다. 한국인 마케팅 매니저인 김인주씨는 “의료와 골프를 결합한 패키지 상품이 한국인들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이 병원의 까오롭 웡쁘라셋 대외협력실장은 “우린 벤츠 같은 명품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도요타 같은 합리적인 수준의 의료비를 받는다”고 비유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미국·영국 등 선진국의 ‘절반 가격’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벤츠 같은 서비스로는 태국의 관광자원을 접목한 여행 상품을 꼽는다. 환자나 동행 가족이 원하면 태국 이외에 인근 동남아 여행상품을 진료 일정에 따라 ‘맞춤 관광상품’으로 가공해 준다. 범룽랏이 오늘날처럼 된 계기는1997년 불어 닥친 외환위기였다. 병실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큰 경제위기를 맞아 부도 위기에 몰리자 미국인 커티스 슈뢰더를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그는 “해외 환자 유치만이 살 길이다. 의료 서비스에 태국의 관광 자원을 결합하자”고 밀어붙였다.

전통 제조업에 상상력을 결합한 사례도 있다. 네덜란드 우주항공연구소(NLR)는 6년 동안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연구한 끝에 최근 상용화에 성공했다. ‘PAL-V 유럽’ 프로젝트다. 시장의 반응도 뜨겁다. 비행자동차를 공개한 뒤 NLR 홈페이지는 한 달 만에 200만 페이지뷰를 돌파했다. 구매 의사를 밝히는 e-메일이 날마다 쏟아진다. 경영컨설팅 업체인 아서디리틀(ADL)의 홍대순 부사장은 “신성장 동력 산업을 찾으려면 업종 간 경계를 허무는 사고를 해야 한다. 기업마다 확보한 뛰어난 기술을 네트워크로 융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일본제철은 스스로 가장 잘하는 철강기술을 활용해 신성장 동력을 찾으려 했다. 일찍이 세라믹·폴리실리콘 등 신소재 분야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는 전략을 쓴 것이다.

조앤 롤링의 팬터지 소설 『해리포터』시리즈도 융합·복합의 성공사례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시작으로 지난해 출간한 완결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출간 직전까지 10년 동안 3억2000만 부를 팔았다.

이를 토대로 영화·캐릭터·관광 산업으로까지 영역을 넓히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렸다. 롤링이 글을 쓴 에든버러 니컬슨 카페와 영화 속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배경이 된 스코틀랜드 샤이얼 호수는 이후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해리포터가 영국 경제에 기여하는 돈이 연 30억 파운드를 넘는다고 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임영모 수석연구원은 “미래 수종사업을 찾으려면 산업구조의 틀을 바꾸는 대신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융합·복합 산업을 육성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제조업보다 낙후된 교육·의료·관광 등 서비스 분야다.

소비자의 급변하는 욕망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산업연구원의 송병준 선임연구위원은 “서비스 부문에서 부가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내려면 심리학·사회학 등 인문학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령 미국 오토바이 메이커인 할리데이비슨은 전통 제조업에서 문화와 꿈을 파는 전략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 회사는 650㏄ 이상 중대형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세계 1위 업체다. 오토바이 가격은 대당 1100만∼3500만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지만 10년간 매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연평균 17.4%)를 유지해 왔다.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검정 재킷과 청바지 같은 ‘할리 스타일’과 귀가 따가울 정도의 엔진 굉음을 파는 전략이 주효했다. 이 회사는 전체 수입의 5분의 1 이상을 의류·액세서리 등에서 올린다. 지포 라이터가 세계적 명성을 유지해 온 것도 할리데이비슨과 비슷한 전략이 주효했다. 흔하디 흔한 라이터에 예술적 감각을 불어넣어 소장가치가 있다는 심리를 만들어냈다.

서울대 송재용(경영학) 교수는 “신성장 동력 산업을 찾으려면 우선 자기 기업이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유망한 연관산업을 찾아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자신의 업종과 무관한 분야를 미래의 성장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면 인수합병(M&A)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표재용·안혜리·장정훈 기자
전경련 김민성 미래산업팀 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임영모·복득규 수석연구원
◇공동기획=

전국경제인연합회,삼성경제연구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