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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우리 팀 막내는 이제 예순 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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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 "뿌 ~ 웅" "푸하하하 … "
동화 공연이 끝나면
애들이 더 해달라며
달려들지
좀 쉬고 싶지만
애들 웃는 얼굴이
자꾸 우릴 부르는 것 같아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는 모습
그걸 보면
우리가 젊어지는 느낌이라니까

그들이 일산 백병원 소아병동에 나타나면 입원한 아이들은 아픔을 잊고 웃음꽃을 피운다. 하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손짓 몸짓에 익살을 부려가며 옛 얘기를 들려주고, 때론 동물 탈을 쓰고서 연극까지 해주는데야.

매달 둘째.넷째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백병원을 찾는 이들. 바로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의 구연동화반 회원들이다. 복지관에서 전문 강사에게 동화 이야기하는 법(구연)을 배워 병원과 일산의 어린이집 등지에서 자원봉사 공연을 하고 있다.

2000년 여름 결성된 뒤 일년 남짓 실력을 쌓고 이듬해 여름부터 공연을 해 200회를 넘어섰다. 회원은 맏이 성춘명(75) 할머니에서 막내(?) 박정옥.송정혜(63)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두 17명.

여느 어르신들께 일산노인복지관은 레저.문화 활동을 펼치는 여가 공간이지만, 구연동화반에게는 공연 연습장이다. 지난 10일에도 회원들은 복지관 2층의 교육실에서 강사가 나눠 준 구연동화 대본을 들고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사슴이 곰을 골리려 방귀를 "뿌~웅" 뀐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엉덩이까지 뒤로 "쑤~욱" 뺐다. 그리곤 터지는 웃음. 당신들 스스로도 그 모습이 우스웠나보다.

이렇게 수요일과 토요일 두시간씩 연습을 해 새로운 레퍼토리를 익힌다. 지금까지 소화해 공연에 내세운 것만도 '별주부전'등 50여 가지다.

회원들은 모두 "처음엔 그저 심심풀이 삼아 손자들에게 옛날 얘기나 들려주려고 동화 구연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백병원의 요청으로 2001년 7월 소아병동에서 첫 자원봉사 공연을 했다. 구연동화반 청일점인 진항주(69) 할아버지는 "공연이 끝난 뒤 아이들이 달려와 안기며 얘기 더 해달라고 떼쓰는 맛에 자원봉사를 계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다리를 다쳐 몸이 불편한 진 할아버지. 그래도 봉사활동은 물론 연습까지 빠짐이 없다. "좀 쉬고 싶지만 애들 웃는 얼굴이 자꾸 등을 떠미는 것 같아."

병원이나 어린이집에서 공연을 할 때면 보호자인 어머니와 교사들도 박수와 웃음을 터뜨리고 앙코르 요청까지 한다고. 이런 열성적인 관객의 반응이 그저 어르신들에 대한 공치레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실력이 만만찮다. 곽인숙(69)할머니는 2001년 10월 '전국여성동화구연대회'에서 으뜸상을 탔다. 당시 주 참가자였던 20.30대들을 누르고서다. 그 뒤 다른 회원들이 매년 심심찮게 입상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봉사 활동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회원들 스스로 일할 곳을 찾아 개인 공연까지 한다. 그래서 원당의 어린이집,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의 치매노인 요양 시설 등도 이들의 상설 공연 무대가 됐다.

왜 이리 열심이실까. 우리 경제.사회를 이끄는 역할은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었지만, 당신들도 당당히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아니, 까놓고 얘기해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골적으로 여쭤봤더니 모두 한목소리로 답했다.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도 조금씩 젊어지는 느낌이라구. 그 맛에 자꾸 공연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거지."

글=권혁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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