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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지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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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기를 놓고 서로 “나의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엄마를 지켜보던 왕은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누라고 했다. 가짜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고 진짜 엄마는 “내가 포기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가려냈다는 게 솔로몬 왕의 지혜다. 구약 성경 외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후덥지근한 더위가 연일 몰아친다. 매일 매일이 초복이고 중복이다. 밤마다 열대야를 피해 도주하는 가족들이 강변에, 계곡에 넘친다. 그래도 이 더위를 사람들은 견뎌낼 수 있다. 계절의 변화는 더위를 우리 곁에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몰아치는 혼돈과 어지러움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광우병 쇠고기 논란이 두 달 넘겨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물을 놓고 무단 유출했느니 열람권이 보장 안 됐다니 하며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한판 붙고 있다.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는가 하면, 일본은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명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느 정치인이 표현했듯이 “한국 정치의 이슈를 덮는 건 또 다른 이슈”다.

그러나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건 혼돈 속에서도 솔로몬의 지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엊그제 또 실용주의를 말했다. 외교안보분야 원로전문가 모임인 서울국제포럼 회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실용주의가 뭐냐”는 질문에 “한반도에서 ‘이념 싸움’은 끝났다는 의미다. 이념 논쟁을 접고 오직 국익을 위해 정책을 펴겠다는 뜻”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말은 기사로 크게 취급되지 않았다. 실용주의란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 바로 이명박이다. 기억도 새롭지 않은가. 기사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건 언론계의 전문용어로 뉴스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취임한 지 5개월이 안 된 대통령의 말에 뉴스 가치가 없다는 건 말의 신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엔 지금 절반의 진리만 돌아다니고 있다. 어느 신문엔 PD수첩 얘기만 나오고, 어느 신문엔 YTN 얘기만 가득하다. 계산기를 두드려야 나올 만큼의 확률을 믿지 못하겠다며 햄버거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촛불로 불러내는가 하면, 분별을 상실한 위정자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말하기 위해 청와대 식탁에 카메라기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한우 농가들은 이 기막힌 장면을 보며 좌절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갈등 해소 장치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갈등을 부추기고 그 갈등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소리(小利)를 취하려는 꼬마 정치꾼들과 궤변만 득실댄다. 그러나 갈등 해소 장치는 고장난 게 아니다. 생각해 내는 이가 없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는 게다. 가장 큰 책임은 실용주의 정부에 있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실용주의를 내건 그들을 택했다. 왜일까.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세력 간 대결의 골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달래줄 줄 알았다. ‘뭘 마이(많이) 미기야(먹여야) 돼’라는 영화 속 대사를 실천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작은 위기에도 허둥대더니 이젠 갈등이 양산해낸 거대한 세력 대결에서 반쪽의 환심만 사자는 쪽으로 타협하고 있다. 중간지대를 키우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노력은 자취를 감췄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좌우는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게 있다. 좌우의 대결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선의의 경쟁이란 점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낙하산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치다.

어느 순간 대통령은 바깥 사람들을 잘 만나지도 않는다. 대통령의 말이 외부에 알려지는 비율도 부쩍 줄었다.

금세 실망하더라도 한 번 더 부탁하고 싶다. ‘어눌하지만 강한 실천력을 담고 있다’던 대통령의 육성으로 “아이를 죽일 순 없지 않으냐”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설 순 없는지를, 내 편·네 편 없이 모셔다 놓고 “내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할 순 없는지를….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