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황주리 서양화展 '추억의 고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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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장도리에 눈이 달려있고 의자등받이에 빨랫줄이 그려져 있다.또쇠여물 주걱같은 나무연장에는 종이배를 탄 남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랑싸움을 하는 장면도 보인다.
만화처럼 공간을 비틀어서 늘이고 줄여 그 속에 사람,그것도 남자와 여자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려넣었던 서양화가 황주리(黃朱里.39)씨가 새로 선보일 작업들이다.
서울 통의동 진화랑(738-7570)에서 3월5일부터 20일까지 선보이는 새작품은 『추억의 고고학』이란 시리즈.
간혹 의자도 있지만 장도리.주걱.가위.집게.저울까지 도저히 그림도구가 될 것 같지 않은 소도구 위에 사람의 얼굴부터 화장실 변기까지 그려넣은 작업들이다.
따로따로 떼놓고 봐도,한데 묶어봐도 제각기 작품이 되는 작업이다. 이전에 이집트 상형문자 속에나 있었을 것같은 인물들을 끄집어내 대도시의 구석진 작은 방안(캔버스)에 밀어넣고 사랑을하고 TV.비디오를 보고 또 전화를 기다리는등 시시한 일을 하게 했던 그의 유머나 위트와도 영판 다른 작업들이다.
굳이 풀이를 하자면 연장이든,도구든 거기에는 손때라는 과거의숨결이 남아있는데 거기에 그림을 그려넣음으로써 과거의 시간 위에 현재를 겹쳤다는 것이다.그래서 추억의 고고학이다.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하기라는 고전적 예술명제를 평범한 물건들의 의인화를 통해 풀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를 조각내 적당히 구획을 지은캔버스 위에 그렸던 초기작업이 작은 나무판 위로 옮겨가고 다시주걱.가위.부지깽이로 옮겨지는 중인 것을 알아차리면 황씨의 그림은 형식이야 어떻게 변하든 장난기 섞인 익살 에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한토막 한토막이 그림일기같은 그녀의 평범한 이야기조각들은 우리의 쓸쓸한 일상을 블랙유머로 조롱하는 것같기도 해 뜨끔한 인상도 없지 않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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