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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주변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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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16면

군락동물의 말석은 언제든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대열에서 낙오될 수 있는 가장자리가 된다. 사람에게도 그런 원시시대의 기억이 유전자에 내장된 탓인지 대개 웬만하면 중심에서 살고 싶어 한다. 아무래도 주변인은 적이나 아군 모두로부터 공격받기 쉽기 때문이다.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집단의 규범과 가치관, 즉 ‘집단의식’에 순응해 다수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정신역동이 생기는 기전이기도 하다.

혼자 소몰이나 양치기 노릇을 해도 생존이 가능했던 서양에 비해 노동집약적 쌀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이었던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에서는 사회에 순응하는 동조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품앗이에 끼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니까. 개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가 동양권에서는 서양적인 외래의 가치관으로 간주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집단의식에 사로잡힌 도당이나 연줄 문화 때문에 주변인이 되면 패거리에서 축출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중국의 변방이라는 지리적 위치에, 끊임없이 중국 문화를 지향하며 생존해온 데 이어 근대에는 일본·미국의 우산 밑에서 살아온 만큼 ‘주변인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센터’ ‘동양의 중심’ ‘세계 최고’ 등의 표현을 남발하고, “세계 ○○단체의 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이 뉴스가 되며,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보겠느냐”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자의식 과잉의 청소년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오히려 중심을 못 찾는 것 같다.

만약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최첨단 테크놀로지였던 청자 제조 기술, 심오한 불교와 유교 철학의 발흥 등 역사적 업적들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조명해 왔다면, 그래도 지금과 같은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에 사로잡혔을까.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미국도 20세기 초반까지는 유럽을 흠모하는 변방에 불과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게르만이 몸집은 좋은데 야만인이라 노예로 쓰기 불편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 역시 그리스 문명의 절정기에는 원시인의 주변국에 불과했다. 그리스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진 문화적 부채가 엄청나다.

우리가 해바라기처럼 한창 절정기에 있는 외부의 무언가를 따라만 간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힘센 어른 수컷 원숭이보다 새끼 암컷이 새로운 외부의 변화나 도구를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니 오히려 아웃사이더임을 감사해야 할 수도 있다.

부처님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창의성을 발휘한다면, 쓸데없이 남 눈치 보고 남 따라 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쪼록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도 달랑 사진 한 방 찍으려고 구걸하듯 부자 나라 누구누구에게 매달리거나, 돈 갖다 퍼주며 감투 하나 얻는 희극은 이젠 좀 그만 보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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