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당연한 것’을 빼앗긴 소록도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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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모르고 3년, 알고 3년, 숨어서 3년, 멸시당하며 30년’. 소록도는 그런 아픔을 지닌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Human & Books 제공]

천국의 하모니카
김범석 지음, Human&Books
319쪽, 1만2500원

타인의 아픔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을까. 내 가슴에 박힌 못이 제일 아프고, 내 눈에서 흐르는 물이 가장 짜다고 느끼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이의 아픔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특히 저 멀리 떨어진 어느 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면.

‘상처가 안 낫고 상처 없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오른발을 먼저 잘랐다. 처음에는 다리 자르고 어찌 사나 싶어서 울었다.’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을 잘라치면 어머니께서는 그 텁텁한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불쌍한 내 새끼…불쌍한 내 새끼…” 그러시면서 우셨어.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는 만날 수 있겠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코가 썩어 문드러져도 아픈 줄 몰라 아픈 병. ‘모르고 3년, 알고 3년, 숨어서 3년, 멸시당하며 30년’ 살아온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가는 소록도 이야기를 그곳에서 1년 동안 공중보건의를 지낸 저자가 담담히 담아냈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눈물 앞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한 인간이 겪어야만 했던 가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저런‘이라는 말 뿐이었다’고.

어린 사슴을 닮은 섬에서 저자가 처음 마주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일상’이다. ‘“할머니, 그럼 제가 안약을 하나 드릴게요. 하루에 한 번 눈에 넣으세요.” 하지만,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안약을 열 수도 넣을 수도 없다. “대변 색깔이 자장면처럼 새까맣게 나오진 않았나요?” 하지만, 눈도 안 보이고 ‘푸세식’ 화장실이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게 저자는 당연한 것들을 빼앗긴 삶을 들여다보며 소록도 사람들의 인생 한 올 한 올을 엮어낸다.

‘한센병에 걸린 부모를 두었지만, 병에는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이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수탄장(슬픔과 탄식의 길)에서 면회가 이뤄졌다. 행여 병균이 아이들 쪽으로 날아갈까 봐 부모들은 바람을 맞고 서서, 3~4미터 건너편에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배 아파 낳은 내 새끼가 정 보고싶으면 당시 섬을 반으로 나누던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몰래 만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철조망에서 만나는 모습이 걸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두드려 맞았다.’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그저 읽는 일만으로도 고된 일이다.

그렇기에 소록도 사람들이 소중히 가꿔온 ‘당연함’은 아름답다. “이거 상추인데, 내가 텃밭에다가 직접 기른 거 중에서 실한 놈으로 좀 골라봤어. 깨끗한 거니까 잡숴“라며 상추를 내미는 할머니의 몽당손이 뭉클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줌마를 딸로 삼은 소록도 할머니는 “저거 밥해줘야 돼서 입원은 못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겪지는 못해도 나누고 기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실이다. 저자가 소박한 문장에 담아낸 이야기들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얄팍한 위로를 넘어선 울림을 준다.

아픈 아내를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늘 병원에 찾아오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하모니카를 분다. ”오늘 밥은 맛있게 먹었어? 반찬은 맛있는 거 나왔나 모르겠네. 오늘은 바깥에 비가 많이 와. 바람도 많이 불더라고. 오늘은 잘 때 이불을 꼭 덮고 자. 알았지?”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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