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기대 못할 對北共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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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한 관계는 지금도 제로섬 게임같은 것인가.그래서 북한에 유리한 것은 반드시 남한에는 불리한가.북.미(北.美)협상을 놓고 생각해 보자.제로섬 게임의 이론을 전제로 한다면 미국이 한국의 동의없이 북한에 비상식량원조를 해주고 평양에 연락사무소를설치하는 것은 이적(利敵) 아니면 우방으로서의 배신행위와 같다. 이것은 바로 대북공조(對北共助)의 문제다.94년 핵협상 때나 지난 1월 쌀 지원문제 때 한국과 미국은 공조전선(共助前線) 이상없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그러나 북핵(北核)에 관한 제네바합의나,쌀지원에 관한 한.미.일(韓.美.日)호 놀룰루합의는 번번이 한국의 불만과 그 불만에 대한 미국의 불만을 낳았다. 북한에 관한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는 당연히 큰 차이를 보인다.그리고 북한은 한.미간을 이간시킬 모든 방도를 강구한다.
이런 실정에서 쌍방에 만족스런 정책조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핵과 쌀에 이어 연락사무소 개설문제가 또 대북공조를 위협하고있다.지난 8~9일 이틀동안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21세기 포럼에는 두나라의 고위관리와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해 한.미(韓.美)간 현안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2 1세기를 전망하는 토론을 벌였다.
토론이 비공개여서 누가 어떤 말을 했다고 밝힐 수는 없다.그러나 참석자들이 토론에서 한 발언과 사석(私席)에서 한 말을 가지고 판단하면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문제에선 한국이 미국을 견제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느 미국인은 연락사무소 설치 문제에서 미국이 한국과 긴밀히 협의는 하겠지만 한국측 입장의 「인질」이 되지는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지난해에 북한을 다녀온 어느 전문가도 이 문제에 관한 북한 내부의 갈등이 조정돼 북. 미간 합의만 되면 한국의반대에 개의치 않고 연락사무소는 개설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연락사무소는 북.미관계 개선에 가장 중요한 이정표(里程標)의 하나가 된다.북한이 바라는대로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가 설치되면 한국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가.북.미간 모든 관계개선 조치의 전제조건으로 한국이 주장해온 남북대화의 재 개와 진전은 하나의 죽은 문서가 되고 만다.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북한외교의 큰 업적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한국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한국측의 한 참가자는 그런 일이일어나면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반미(反美)감정이 촉발될 것이라고경고했다.그러나 미국사람들은 그런 경고에 큰 비중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가 생겨 북한에 관한 정보갈증이 해소되고 북.미 접촉이 훨씬 쉬워지는 것이 반드시 한국에 불리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왔다.
미국은 제 갈 길을 간다.한국이 제시하는 조건은 통하지 않는다.한국의 4월 총선거가 끝나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더욱 유연해질 것 같다.북한의 당장의 붕괴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국의 입장이고,북한이 당분간 남북대화에 응할 처지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면 평양 한복판에 성조기가 날리는 것이 오히려 전쟁위험을 막고 장기적으로 북한사회를 정상화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미 중국.러시아와 정식으로 외교관계까지 맺었다.그리고 한국은 북한에 대해 거의 압도적인 국력의 우위를 누린다.평양에 설치되는 미국의 연락사무소가 북한의 모험을 견제하는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한국에도 긍정적 요소다.
다만 한국은 연락사무소 설치를 양해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접촉의 포기와 연락사무소 이상의 대북관계 확대는 남북관계의진전과 연계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일종의 패키지 흥정이다.미국이 연락사무소를 중요시하는 정도로 보아 그 정도의 대가는치를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에서)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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