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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에 9·11 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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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의회 9.11 테러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활동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못 나온다고 완강히 버티던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결국 증언대에 불러 세웠고, 전직 대통령과 부통령의 증언도 청취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에 대한 비공개 조사만 사실상 남겨놓고 있다.

백악관의 비협조에도 9.11 특위는 지난 1년여 동안 1000여명의 전.현직 관리를 인터뷰했고, 비밀서류를 포함해 200만쪽이 넘는 문서를 열람했다. 집권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 측 인사가 각각 5명씩 참여하고 있는 이 초당(超黨)위원회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 내놓게 될 최종보고서 내용에 벌써부터 미국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주 미 주요 TV 채널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3시간 가까이 진행된 라이스 보좌관의 증언은 9.11 특위 청문회의 하이라이트였다. 백악관 측은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분립 원칙을 내세워 라이스의 청문회 출석과 공개증언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여론의 압력과 초당적 요구에 밀려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라이스의 증언은 그의 휘하에서 대(對)테러 대책을 담당했던 리처드 클라크 전 보좌관의 청문회 증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클라크는 9.11 테러는 부시 행정부 안보팀의 정책 실패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거듭된 경고에도 안보팀은 알카에다의 미국 내 테러 가능성을 무시했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라이스의 증언에서는 9.11 테러가 터지기 약 한달 전인 2001년 8월 6일 부시에게 전달된 '빈 라덴 미 본토에 대한 공격 결심'이란 제목의 '대통령 일일 정보보고'(PDB) 내용에 대한 공방이 집중됐다. 부시가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한달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라이스는 오사마 빈 라덴의 과거 행적에 근거한 추론 수준의 정보 보고에 불과했다고 의미를 축소했지만 민주당 측 위원들은 항공기 납치와 뉴욕 시내 연방청사 건물 폭파 등 보다 구체적인 테러 가능성이 적시돼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해당 문서의 비밀 해제와 공개를 요구했다. 민주당 측 위원들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클라크의 증언이 결정적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이 예상된다.

'테러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부시는 전시(戰時) 지도자의 이미지에 재선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꼬여가는 이라크 사태와 9.11 진상조사 특위 파장으로 재선 전략이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국민의 안전보장이라는 정작 중요한 책무는 팽개친 채 무모한 전쟁으로 국민의 귀중한 목숨과 국고를 낭비한 책임을 물어 탄핵해야 마땅하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인터넷과 언론매체 등을 통해 부시 탄핵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는 시민단체만 10여개에 달한다. 공화당이 의회 다수당이라는 점에서 탄핵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라크 사태의 향배와 9.11 특위의 최종보고서 내용에 따라 부시의 정치적 운명은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전쟁 목적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국제 여론의 지지가 없는 전쟁은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이 된다는 것은 30년 전 베트남전이 미국에 남긴 교훈이었다. 이라크와 베트남의 상황은 분명 다르지만 미국에 진퇴양난의 딜레마가 되고 있는 점은 비슷하다. 9.11 특위가 당파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놓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배명복 순회 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