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어물쩍 넘어간 '前科공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사기.횡령.배임.강간과 간통.폭행,그리고 국가보안법….보통 국민들은 말만 들어도 떨리는 범죄들이다.그런데 국민의 대표가 되고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사람중에 이런 전과자들이 수두룩하다.실제 13대국회에서는 전과 「별」을 여러개씩 달고 있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했다.
전과를 알고도 표를 찍어줄 유권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따라서『공인으로 나서려면 자신의 과거에 대한 투명성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유권자의 요구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15대 총선에서도 결국 물건너가버렸다.정작 그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반대했기 때문이다.우선야당이 펄펄 뛰었다.『후보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논리다.그렇다면 「전과와 경력을 속이는 인권」을 위해 유권 자들의 「알권리」는 침해돼도 된다는 말인가.공직자 재산공개는 왜 위헌이라고주장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과거 군사정권아래서 공작에 넘어가 엉뚱하게 전과자가 됐다』는 강변도 나왔다.
그러나 공작때문에 사기꾼이 되고 파렴치범이 됐다면 그에 대한판단은 유권자가 할 것이다.설혹 그렇다해도 원인제공 책임의 상당부분은 본인에게 있다.
과거에 체제 자체를 부정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정치권으로 들어오기에 앞서 최소한 『나는 과거엔이랬지만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다』는 양심고백을 해야한다.색깔론을 들먹거리자는게 아니다.그게 유권자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한 일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전과.경력문제를 들고나온 여당 역시 미온적이긴 마찬가지였다.어차피 「협상용」이었다는 인상이다.여야는 『정당이 공천희망자들의 전과조회를 요청하면 관계기관이 이를 제공해 각자 참고(?)하게 하자』고 어물쩍 넘어갔다.눈가리고 아 웅이다.
자신의 과거와 학력.경력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를 쓰고 국회로 가려는 이유는 뻔하다.전과를 감추고 경력을 속여도 당선만 되면 그때부턴「의원님」이 되기 때문이다.그만큼 우리의 정치엘리트 선발 과정이 허술하다는 얘기도 된다.때로는 전과자가 민주인사로 둔갑되기도 한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사람들이 이런 인물들로 구성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입법을 맡기라는 얘긴지 모르겠다.
김종혁 정치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