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섬소녀’의 하버드 1년 ②세계서 둘째로 큰 와이드너 도서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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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15면

지난 1년 동안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기숙사 창문 너머로 학교 중앙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미국 국회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큰 도서관인 와이드너의 하얀 대리석이 햇살에 빛날 때마다 벅찬 감동을 느꼈다. 하버드 졸업생인 해리 와이드너는 1912년 자신이 아끼던 책을 가지러 가라앉는 선실로 돌아가다 타이타닉호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리기 위해 도서관을 세웠다. 어머니는 도서관의 구조를 바꾸거나 위치를 옮길 시 도서관 재산을 하버드에서 케임브리지시로 넘기겠다고 엄포를 놨다. 수백억 가치의 도서관을 시에 넘길 수 없었기에 하버드는 싫으나 좋으나 도서관에 손조차 못 대게 됐다.

학생이 필요한 책 3일이면 전 세계를 뒤져 구해와

도서관이 사교의 場

이 덕분에 와이드너 도서관은 여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300만 권이 넘는 도서를 소장하면서 하버드의 지식 허브 역할을 한다. 캠퍼스 투어 때 도서관 사서가 했던 말이 인상 깊다. “필요한 책은 24시간 안에 빌릴 수 있습니다. 필요한 책이 도서관에 없다면 우리는 48시간 안에 보스턴시 외곽에 있는 서고에서 책을 가져옵니다. 만약 하버드에 없는 책이라면 72시간 안에 어디서든 구해옵니다.”

100여 년 전통의 와이드너 기념도서관은 300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한 세계에서 둘째로 큰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존 하버드 동상과 함께 하버드대의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신인섭 기자

그러나 와이드너 도서관의 자리는 대부분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 차지다. 학부생은 24시간 문을 여는 라몬트 도서관을 주로 이용한다. 새벽녘 도서관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라몬트 도서관은 하버드의 사교 생활을 위해 중요한 장소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은 마사지 행사, 요가 수업, 커피 시음 등 다양한 서비스를 내세우며 학생들에게 한발 더 다가선다. “오늘 오전 8시부터 커피 공짜래! 이따 도서관 카페서 보자.” 이런 약속을 하는 학생도 많다. 도서관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던 룸메이트가 어느 날 도서관에 간다기에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니 “마사지해 준다기에…” 하고 말을 흐린다.

하버드에는 와이드너를 포함해 30개가 넘는 도서관이 있다. 6400명의 하버드 학생은 공부하는 스타일이 제각각이어서 좋아하는 도서관도 다르다. “난 캐봇 과학도서관이 좋아. 더럽고, 책상에 낙서가 많아서 재밌거든.” “펜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소리조차 민망한, 절대적인 고요함을 자랑하는 법학대학원 도서관을 사랑해.”

도서관에 학생들이 항상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하버드가 얼마나 많은 학습량을 요구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버드는 필수과목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인문학적 기반과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공과는 상관없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 과목’이란 강도 높은 프로그램이 유명하다. 하버드의 졸업학점은 32학점(한 과목이 1학점이다)으로, 학생들은 한 학기에 많아야 5과목을 듣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학문을 11개 분야로 나눠 자기 전공에서 거리가 먼 7개 분야에서 교양 수업을 한 개씩 수강해야 한다.

까다로운 이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거의 100년간 논쟁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7과목 때문에 전공에 몰입할 수 없다고 주장해 온 반면 학교 측은 하버드 졸업생은 다양한 분야에 박학다식해야 한다고 맞서왔다. 논쟁은 올해가 돼서야 끝났다. 학교 측은 내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대신할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 직후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는 너무 느려.”

몇십 년을 고민한 뒤 새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하버드는 19년 동안 한국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의 교육은 1년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자주 바뀌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실감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나오는 백과사전 두께의 수업 소개 카탈로그에는 올해 수업뿐 아니라 내년 수업들까지 상세히 안내되어 있다. 덕분에 학생들은 여유를 갖고 수강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이번 학기 역사 필수 과목은 왜 안 들어?” “내년에 라틴아메리카 미디어 역사에 대한 수업을 들으려고.” 이런 식이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며 거듭난다. 내가 들은 수업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학년 세미나(Freshman Seminar)’ ‘작문 수업(Expository Writing)’이다. 세미나 수업은 하버드의 자랑거리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맨큐 교수의 미시경제학 입문 수업은 1000명 이상의 학생이 함께 들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세미나 수업이 학생들과 교수의 거리를 좁힌다. 이 수업에선 책이나 신문에서나 봤던 내로라하는 교수, 예를 들어 경영대학원의 타룬 칸나, 케네디스쿨의 리처드 쿠퍼가 10여 명의 신입생과 토론을 한다. 내 룸메이트는 하버드 의과대학원 휴벨 교수의 강의를 수강했는데, 종강하는 날 교수 집에 저녁 초대를 받기도 했다.

학생이 깐깐하게 교수 평가

작문 수업은 리포트·에세이·논문을 쓰는 데 필요한 작문 실력을 쌓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해 이 수업에서 두 번째로 쓴 에세이가 인상에 남는다. 에세이를 준비하는 동안 교수님은 학교 미술관에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현대 미술의 거장 잭슨 폴록의 작품 앞에서 직접 에세이를 고쳐 주며 최고의 에세이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여간 깐깐한 게 아니다. 학기 말이면 학생들은 점수로 교수를 평가하고 학교 측은 이를 인터넷에 공개한다.

학생들은 사실 수업시간마다 강의를 평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된 책 『더 행복하게: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의 저자 탈 벤 샤허 교수의 ‘긍정 심리학’은 800명 넘는 학생이 수강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 열정적인 강의에 화답한다.

몇 주 전 와이드너 도서관 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말을 걸었다. “하버드 학생이세요? 학교 좋아요?” 나는 뒤를 돌아 도서관을 바라보며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천국 같은 곳이에요”라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