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조선어연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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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20년대에 두개의 '조선어연구회'가 설립됐다.

하나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1921). 주시경 선생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단체로 후일 '조선어학회사건'(1942)으로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반면 학자들에게도 생소한 또 하나의 조선어연구회(1925)가 있었다. '조선어문전'등을 펴낸 이완응이 회장을 맡았으며, 조선총독부 등의 지원을 받은 관변단체였다.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소(소장 윤희원)는 8일 '관변 조선어연구회'가 펴낸 잡지와 교과서 등 그간 알려지지 않은 어문교육 관련 자료를 다수 공개했다.

일제시대의 '한글 교육'이라면 흔히 식민당국의 탄압과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연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한글 연구단체'는 다소 의외다. 그러나 자료에 따르면 관변 조선어연구회는 정기적으로 잡지를 발간하고 교과서를 펴내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했다.

국어교육연구소의 허재영 선임연구원은 "이 시기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본인 관리들을 대상으로 조선어 시험을 치르는 등 조선어 장려정책을 시행했으며,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순한글 계몽자료를 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월간 조선어'도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총 40권이 발간됐다. 잡지에 수록된 이완응의 일기에는 친일파 이완용이 조선어에 '다대한'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청했다는 내용도 있다.

김혜정 선임연구원은 "1930년대에 총독부가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보급 운동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문맹퇴치 등 근대성의 성취는 식민당국과 민족주의자들의 이해가 일부 겹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문교육 부문에도 이른바 '식민지적 근대'가 존재할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는 명확했다. 金연구원은 "일제에 조선어는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식민통치의 도구이자 '국어'인 일본어 습득을 위한 매개어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1938년 이후 조선어 교육이 전면 금지된 것은 한일병합 당시 1%에도 못 미치던 국내 일본어 습득자가 20% 이상으로 늘어난 상황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소는 오는 24일 '근현대 민족어문교육 기초연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새로 발굴된 자료를 소개할 예정이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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