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아버지와 영화 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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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17년 만에 처음으로 네 가족이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봤다. 무척 감동적이었고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오남매가 어렸을 적엔 군대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으며 자랐고, 아버지는 군대 얘기로 늘 우리를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며 내내 떠올렸던 우리 아버지…. 결국 나는 이 영화를 아버지와 꼭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가 사는 곳은 극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곳으로 모시고 와 시간에 맞춰 극장을 찾았다.

연세가 80인 아버지를 부축하며 안내원의 뒤를 따라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영화가 막 시작돼 영화관 안은 어두웠다. 아버지는 그런 현장을 이해할수 없었는지 앞서 가는 극장측 안내를 큰소리로 부르더니 "전깃불 좀 켜주쇼, 이렇게 깜깜하면 어떻게 걸어가겠소?"하시는 것이다.

안내원은 깜짝 놀라 아버지를 향해 "쉿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귀가 어두워 그런 작은 소리는 못 알아 들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시작된 영화 첫 장면에서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전화를 바꿔주는 그런 장면에서 "할아버지" 라고 부르자 아버지는 뒤에 따라오는 손녀의 목소리로 착각하여 "응~" 이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시는 게 아닌가. 뒤이어 배우의 "전화받으세요" 라는 소리가 들리자 또 다시 손녀의 음성으로 착각하고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휴대전화를 찾으시더니 "응, 전화? 알았다 상희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평소 목소리가 큰 아버지의 이런 황당한 모습에 안내 측도 당황했겠지만 가장 마음을 졸인 것은 우리 가족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곳에 있는 관객들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염치없었던지…. 영화가 끝나기까지 또 다른 실수를 하지 않을까 내내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런 딸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상영시간 내내 6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마냥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흐뭇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홀로 남아 고향집을 지키며 외롭게 생활하시는 아버지를 오랜만에 즐겁게 해드린 것 같아 방금 전 극장에서 마음을 졸였던 것은 까맣게 잊었다. 아버지께서 흐뭇해 하시니 내 가슴 한켠에 무겁게 짓눌려 있던 마음도 절로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어느덧 3월도 다 지나가고 지금 창밖에는 수줍은 꽃망울이 여기저기서 봄을 알리는 듯 탄성을 자아내는데 돌아오는 주말에는 아버지 손 꽉 잡고 향긋한 봄내음 맡으며 꽃구경이나 떠나볼까?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으면서….

이정희(전북 전주시 완산구 상천동 1가.4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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