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검은돈' '흰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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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지난 9일의 대국민연설에서 정치자금에관해 언급한 대목은 과연 무엇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는지 아무리 거듭 읽어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도 과거 야당시절이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활동을 위해 저의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이 구절은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고 국민의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러나다음 구절을 보면 뉘앙스가 전혀 달라진다.
『그러나 깨끗하지 못한 검은돈,어떠한 이권과 관련된 돈이나 조건이 붙은 돈은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자신은 남들과 같지않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대목도 마찬가지다.
『저를 포함한 그 어떤 정치인도 이러한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이 구절은 분명히 지난날에는너나 없이 비합법적인 정치자금 수수 관행에 젖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그러나 이 구절의 뉘앙스 역시 곧바로 뒤 를 잇는 『그러나 저는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서는 단 한푼도 받거나 쓰지않았습니다』에 의해 강조점이 뒤바뀌고 있다.이 대목에서도 자신의 차별성을 애써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헷갈린다 했지만 문장론적으로 보면 실은 헷갈릴 것도 없다.「그러나」라는 접속사는 뒷구절에 무게를 실을 때 쓰는 단어이므로뒷구절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자금에 관한 모처럼의 언급으로 이에 관한 논의가가닥이 잡히기는 커녕 더욱더 혼미하게 돼버렸다.
그러면 기업인이 정치인들에게 건네는 돈에 검은돈,흰돈의 구별이 있고 그중 흰돈은 괜찮다는 것인가.또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받아도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 쓰지만 않았다면 역시 양해할 만하다는 것인가.대통령의 언급은 자신의 차별성만 강조 하고 있을 뿐 이런 반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은 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요즘 정부.여당이나 검찰의 과거 정치자금에 대한 개념규정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검은돈이라도 받아 정치권에주었으면 정치자금이 되고,안주었으면 뇌물이 되는 것인지 견해가제각각이어서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또 노태우(盧泰愚)씨의 비자금이 모두 뇌물이라면 여당에 준 것이든,야당에 준 것이든 그것이 뇌물의 일부분인 이상 몰수해야마땅하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는게 아닌가.
정치권의 사정(司正)도 국민감정에는 맞을는지 모르지만 형평성이나 일관성 측면에서 보면 십분 반발이 나옴직하다.정치거물은 예외고 거물이 못되면 사정대상이 된다는 말인가.정치거물들만 해도 당선자는 양해받을 수 있고 당선 못한 사람은 양해받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고 해서 일반 국민이 선선히 면죄부를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그러나 어떻든 일단 양해를 구하는 마당이라면 같은 시대를 산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동일하고 일관성있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맨먼저 해야 할 일일 것이다.검증도 안된채 그저 내 것은 흰 돈이요 남이 받은 것은 검은돈이라고 하거나 받은 것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기업이 준 것은 문제삼는 식이어서는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시대적 과제는 어떻게 하면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관행과 법.제도가 일치하는 풍토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그런데도 정작 그러한 제도화나 법제화 작업은 미진한 구석 투성이다.가령 새 정치자금법만 해도 수입에 관한 규정 만 있지 사용처에 대한 규정은 없다.그렇다면 당비나 후원금.기탁금.국고보조금을 받아 개인적 용도에 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와서 이것은 검은돈이요,저것은 흰돈 하는 식의 구별은 시급한 문제도 아니고 더구나 그것을 무기로 한 정략은 바람직하지않다.먼저 과거의 관행을 처리할 일관성있는 논리라도 세우고 과거의 관행이 되풀이되지 않을 철저한 법적.제도적 정비를 한 다음 다같이 국민앞에 무릎꿇고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는게 일의 순서요 정치 바로세우기일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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