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의 ㅋㅋㅋ <6> 그의 ‘마법’은 어디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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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전에서 진 뒤 경기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네덜란드의 라파얼 판데르파르트. [바젤 AP=연합뉴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나를 경기장에 내보낼 때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viel spass !!!!”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재미있게 해봐!!!!”란 뜻의 독일어다. 경기를 재미있게 하라고? 감독의 이런 주문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귀에 와닿는 히딩크의 입김은 나만 특별히 사랑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또 자기가 기분이 좋거나 내가 너무 긴장한 것처럼 보이면 살짝 윙크도 했다. 덩치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나는 그의 속삭임을 들으면 “못해도 괜찮아, 너 맘대로 해봐!”라고 히딩크 감독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다리가 가벼워지곤 했다. 이렇게 히딩크는 아주 매력적인 감독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지훈련 할 때다. 나는 샴페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엘리자베스(히딩크의 여자 친구) 방으로 가는 히딩크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버렸다. 또 윙크. 그래서 나도 웃었다. 그는 우리 아버지와 다르게 너무 엄격하지도, 완벽한 사람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가 우리를 다스렸던 무기는 솔선수범, 모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선수들을 언제 조이고 언제 풀어줘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절묘한 감각’이다.

2002년 월드컵 때, 꿈에 그리던 16강 진출을 해내고 우리는 완전 들떠 있었다. 막내들이었던 나랑 이천수는 물론이고 형들도 16강전 스코어 맞히기를 하면서 맘껏 떠들고 웃으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감독이 조용히 옆방으로 우리를 불렀다. 모두 밥숟가락을 놓고 쏴---!하는 분위기로 일어났다. 히딩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너희들한테 좀 ‘풀어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러지 마라.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화를 낸 것도, 질책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폼 나게 야단을 맞아본 적이 없어서 모두 멀뚱멀뚱하며 미팅 룸을 나오는데, “나는 집합하는 줄 알았네”하면서 (황)선홍이 형이 분위기를 풀어줘서 모두 웃었다.

이때 화를 냈다면 아마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게 분명하다. 감독의 질책 아닌 질책을 들은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고, 이탈리아를 꺾고 8강으로 GO---! 했다.

러시아는 이번 유로 2008에서 가장 어린 팀이다. 가능성이 무한한 이 미완의 무기들은 히딩크의 손바닥 속에서 주물러지면서 끈기와 강도를 높여갔을 것이다. (송)종국이형, 지성이, 천수, 나… 우리들을 주인에게 충실한 싸움개로 만들어 놓았던 그 솜씨로 히딩크는 결국 네덜란드를 주저앉혀 버렸다. 8강전이 열린 날 바젤 운동장은 마치 오렌지 창고 같았다. 네덜란드 관중이 거의 모든 자리를 채웠다.

판바스턴의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한 크루이프도 부인과 함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굶주린 히딩크의 싸움개들 앞에서 럭셔리한 네덜란드는 화려하지도 강하지도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예선에서만 펄펄 날았을 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보따리를 싸야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저것들 또 저런다”며 혀를 찼다. 축구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면서 100% 가진 것을 모두 뽑아내는 히딩크.

정말 대단하다. 독일과 러시아가 결승에서 만나면 누굴 응원할까? 그래도 나는 그런 행복한 고민에 푹 빠지고 싶다.

차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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