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에 빠진 ‘라면 왕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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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32면

1990년대 맥주 전쟁에서 OB는 하이트에 1위를 내줬다. ‘맥주 왕국’으로 군림해 온 OB의 패인은 상대방에 밀려서가 아니라 자만에서 비롯됐다. 시장에서 계속 소비자 선호가 떨어진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계열 광고대행사는 시장 현황 자료를 적당히 다듬어 최고경영진에 ‘끄떡없다’는 보고서만 올렸다. 하이트 쓰나미가 몰려오던 93년에도 전북 무주에 전 임직원을 모아놓고 ‘OB스카이 1억 병 판매 자축연’을 열었다. 당시 OB의 시장 점유율은 70%였다.

요즘 ‘라면 왕국’ 농심의 행태를 보면 OB를 다시 보는 듯하다. 농심은 식품업계에서 보기 드문 갑(甲) 회사다. 라면 시장 점유율이 70%가 넘다 보니 판매상마다 서로 물건을 달라고 졸라댄다. 밀가루 값이 올라도 소비자에게 넘기면 그만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농심이 잘한 결과다. 시장에서 사랑받는 좋은 제품을 만든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농심은 괴롭다. 이달 7일 전북 전주의 한 소비자가 신라면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농심 측은 유통·보관 과정 중에 봉지에 붙어 있던 바퀴벌레가 라면을 끓이던 물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결과는 식품의약품안전청 조사가 끝나는 이번 주말께 밝혀지겠지만 문제는 농심의 늑장 대응이다.
이 일이 알려진 것은 17일 한 지역 언론에 보도되면서다. 식의약청이 조사에 들어가자 이튿날 농심은 식의약청으로 뛰어갔다. 정식으로 사고를 신고한 것은 하루 뒤인 19일이다. 매출 500억원이 넘는 기업은 이물 발견 민원이 생기면 곧바로 식의약청에 보고하도록 한 ‘이물 보고 및 조사 지침’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알고 보면 이 ‘지침’도 지난 3월 발생한 농심의 ‘생쥐깡’ 사건 여파로 만들어진 것이다.

늑장 비판에 대해 농심도 억울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제보자가 과다 보상을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생쥐깡’ 파동으로 최고경영진이 소비자 불만을 듣는 핫라인을 개설하고, 식품안전자문단을 구성하는 등 고객 안심 프로젝트를 선포한 게 무색하게 됐다.

사람의 입맛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입맛을 잡고 있는 회사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경쟁력이 영원할 수는 없다. 16년 전 OB가 왕좌를 내주는 데 3년이 걸렸다. 19년 전 삼양식품이 우지 파동으로 서울 공장 문을 닫는 데는 불과 3개월이 걸렸을 뿐이다. ‘생쥐깡’ ‘바퀴벌레 신라면’이 농심에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갑의 관습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최고경영진이 나서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시장의 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미국 보험회사 관리자였던 H W 하인리히는 1920년대 미국 산업재해 통계를 분석하면서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의 대형 재난이 터지기까지 그 전에 29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훨씬 전에 300건의 사소한 이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1:29:300 법칙’으로 불리는 이 경험칙은 미미한 사태라도 사전에 막아야 큰 재앙을 막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농심이 최근의 사태를 ‘300개’쯤에 해당하는 사소한 이상으로 여긴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겠지만 시장은 늘 예상보다 빨리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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