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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와인 애호가의 품종 타령 -‘사이드웨이’의 마일스의 경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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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09면

대부분의 와인 애호가는 저마다 자신이 꼽는 최고의 품종 하나쯤은 마음속에 새겨 놓고 있다. 처음 만난 와인 친구와 우연히 그것을 공유하게 되면 마치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원의 기적적 조우라도 이룬 듯 턱없이 흥분하기도 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형편없는 품종이라 여기는 것을 누가 거품을 물며 찬양해 대면 상대 몰래 그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품종에 관한 한 우열은 없다. 그것이 얕은 와인 내공을 가진 나의 생각이다. 다만 품종마다 개성이 있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뿐이다.

심산의 영화 속 와인

우리의 사랑스러운 루저 마일스(폴 지아마티)에게는 품종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다. 너무 유약할뿐더러 예민하고 콤플렉스에 가득 차 있는 그는 결코 포커페이스를 지을 수 없어 품종에 대한 호불호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특정 품종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대법원의 판결문을 읽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선언(!)이 결코 절대적으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의 캐릭터를 넌지시 드러내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 바로 영화 ‘사이드웨이’의 숨겨진 매력이다.

와인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접하게 되는 품종은 물론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흔히 레드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꼽고, 화이트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으로 ‘샤르도네’를 꼽는다. 하지만 마일스의 평가는 단호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풍성하고 강하며 기분 좋은 향을 내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내게는 그다지 매력 없는 품종처럼 느껴져. 샤르도네? 세상에서 가장 순수성을 잃은 와인이야.”

마일스는 왜 카베르네 소비뇽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매사에 자신이 없는 그는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관객인 내가 넘겨짚어 볼 뿐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너무 흔하다. 이 품종은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편인데,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며 누군가를 지배하려 든다. 전형적인 보르도 스타일의 블렌딩이란 어떤 것인가.

카베르네 소비뇽이 천하를 호령하는데, ‘카베르네 프랑’이 그를 보좌하고, ‘메를로’가 그의 각진 부분을 부드럽게 해주며, ‘프티 베르도’가 산도(酸度)를 높여 주고, ‘말벡’이 색소를 진하게 해 주는 형국이다. 그렇게 보좌관과 부하들을 거느려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품종이다.

어떤 뜻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은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을 닮았다. 잭이 영화 속에서 보여 주는 천박함·마초주의·잡초근성·강인함 따위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샤르도네를 가리켜 ‘순수성을 잃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다소 의외의 취향이다.
샤르도네는 여간해서 블렌딩을 허용하지 않는 ‘순수성(purity)’의 품종이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부르고뉴의 화이트 와인은 대부분 ‘샤르도네 100%’로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마일스 취향의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리슬링’에 대한 그의 평가다. “나는 리슬링이 풍미가 부족하고 소박한 맛의 와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 거듭 말하거니와 취향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경향 따위가 있을 뿐이다. 마일스에게는 마이너적인 경향이 있다. 그는 대중적인 샤르도네보다 소수의 매니어가 사랑하는 리슬링에 마음이 기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취향은 그의 캐릭터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요컨대 대로(boulevard)보다 샛길(sideway)에 어울리는 삶이라고나 할까.

마일스가 가장 격렬하게 혐오하고 있는 품종은 메를로(merlot)다. 두 여자와의 저녁 데이트를 앞두고 잭이 마일스를 달랜다. “너 제발 와인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 대지 마. 중요한 건 저 여자들을 꼬이는 일이라고.” 하지만 마일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난 절대로 싸구려 와인은 못 참아!” 이때 우리말 자막으로 ‘싸구려’로 표기된 단어가 바로 메를로였다. 영어 발음으로는 ‘멀롯’이라고 하는데, ‘메를로’ 광팬들이 들으면 식겁할 표현이다.

마일스의 마음을 나는 이렇게 넘겨짚어 본다. 메를로는 보르도 지롱드강 좌안에서 기껏해야 카베르네 소비뇽을 보좌하던 품종에 불과하다. 그런 품종이 하나의 독립된 품종처럼 행세하는 꼴을 나는 못 보겠다. 내 비록 초라한 샛길 혹은 뒤안길을 걸어야만 하는 삶을 살지라도 누구의 하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요컨대 용의 꼬리로 사느니 뱀의 머리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마일스는 이 장면 훨씬 이전, 영화의 초반부에 이미 메를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개성 없는 와인을 분류할 때 거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와인이지.”
그렇다면 이 까다롭고 편협한 와인 애호가가 상찬하는 품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스테파니의 집에서 마야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와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마일스는 수줍은 얼굴로 이렇게 고백한다.

“‘시라’의 100% 순수한 매력 때문에 ‘피노 누아’의 매력이 간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즉 그는 한때 시라를 무척 좋아했으나 이제는 피노 누아가 가장 좋다는 것이다. 따뜻한 표정의 마야가 그에게 묻는다. “도대체 피노 누아가 왜 그렇게 좋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마일스의 길고 긴 대사는 피노 누아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바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노 누아는 아무 데서나 잘 자라지 않는다. 까다롭다. 유약하며 예민하다. 하지만 순수하다. 다른 품종들과 잘 섞이지 못할뿐더러 섞이면 그 즉시 자신의 개성을 잃어 버린다.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돌봐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비로소 열매를 맺고 와인으로 빚어지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게 피노 누아다. 그게 마일스다.

타인의 취향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이드웨이’의 주인공 마일스의 품종 타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의 취향을 통하여 그의 삶의 내면 세계를 엿보고 우리 삶을 되돌아볼 뿐이다.

나는 ‘사이드웨이’의 네 인물에게서 그들 나름의 품종을 읽어 낸다. 마일스는 피노 누아이고, 마야는 시라이며, 잭은 카베르네 소비뇽이고, 스테파니는 ‘그르나슈’이다. 당신은 어떤 품종에 가까운가. 굳이 정답을 찾으려 골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요컨대 이런 유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토마스·사비나·테레사·프란츠 중 누구에 가까운 캐릭터인가.


심산씨는 ‘심산의 와인예찬’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 등을 썼으며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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