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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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자에겐 갑작스레 싹 바뀌는 놀라운 천성이 있다.』 로맹 롤랑의 말이다.
아리영도 별안간에 변신했다.자기 일조차 늘 남의 일 보듯 나른했던 「방관자」의 자세에서 야무지고 당찬 「참여자」로 돌연 바뀐 것이다.
로맹 롤랑은 말을 이었다.
『여자가 보이는 그같은 「즉사(卽死)」나 갑작스런 「재생(再生)」의 모습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를 두렵게 한다.』 아리영은 이혼을 위한 신속한 행군을 시작했고 남편은 주눅든소년처럼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혼하려면 우선 서류가 필요하다.
「협의이혼 의사확인서」 한 통,「이혼신고서」 세 통,「호적등본」 한 통,「주민등록등본」 한 통.이들 한아름의 서류와 함께주민등록증과 도장을 지참,가정법원으로 부부가 나란히 가서 관계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진술해 그 조서에 서명 날 인도 해야 한다. 서로 합의해 이혼하는데 웬 서류가 이리도 많고 수속이 번다한지….이혼을 막거나 사기를 예방하는 장애물로 일부러 장치해둔것인가. 그러나 아리영한테 그것은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단지 난관이 있다면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내는 일이다.
농장으로 내려갔다.여드레만이다.
아리영의 짐작대로 아버지의 여름감기는 별것이 아니었지만 갑작스레 늙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과 주스를 만들어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아버지는 읽던 책을 덮고 돋보기를 벗으며 아리영을 쳐다봤다.
『거기 좀 앉아라.』 아버지는 아리영의 뜻을 알고 있었다.먼저 내려온 남편이 대충 사정 이야기를 한 것같았다.
『미스터 조 때문이냐?』 뜻밖의 질문에 아리영은 힘주어 고개저었다. 『나선생 때문이냐?』 『그분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자신의 문제예요.여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이서방도 일찌감치 놔주어서 새장가 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마지막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책을 펴들었다.
『나의 생사관(生死觀)…어떻게 살 것인가』-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저서다.
『…인생은 잘 쓰면 큰일을 이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긴 것이지만 시간을 헛쓰는 자에겐 아주 짧은 것이다…,2,000년 전의 이 책이 아직도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건 인간의 사고방식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그것은 아리영에게 주는아버지의 대답이기도 했다.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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