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팩션"과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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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역사를 드라마에 담는 일은 어차피 모험이다.사실(fact)이픽션(fiction)과 뒤범벅되기 때문이다.몇가지 사실을 토대로 상상력이 날개를 달 때 결과는 역사의 소설화(novelization)다.사실과 픽션의 결합은 사실도 아니 고 픽션도 아닌,팩션(faction)이란 어정쩡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팩션 작가나 TV의 다큐드라마 작가들은 그 정당성을 셰익스피어에서 구한다.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실재(實在)인물들을 주역으로불후의 희곡들을 썼다.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통해 그 자신이 역사적 진실을 재현한다는 오기를 부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공연무대는 객석 2,000명 정도의 극장이 고작이었다.지구촌 안방에 파고들며 끝없는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오늘의 전파미디어와 그 영향력은 비교가 안된다.
귀재(鬼才) 올리버 스톤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닉슨』이 다시금 팩션논쟁을 불러오고 있다.「짙게 의견화된」 닉슨은 「실재의 닉슨」일 수 없다는 비판이다.따라서 영화 제목부터 「어떤 닉슨」 또는 「올리버 스톤의 닉슨」이 제격이라는 주장들이다.스톤은 영화 속에 녹음테이프의 육성과 실제 있었던 대화,사실보도장면등 무려 126개의 「사실」들을 요소요소에 삽입하고 영화 속의 모든 연설 역시 원전(原典)그대로 읽게 배려했다.그러면서도 영화의 첫머리에 「장면들은 응축되 고 가상화됐다」는 분명한경고를 붙였다.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자기고백이다.그 자신 닉슨사가(史家)일 수가 없다.영화의 절반은 사실을 바탕으로 했고 나머지는 「건전한 추측과 아슬아슬한 명예훼손」으로 채웠다고 한다.극적 효과를 위해 악역(惡役)과 속죄양을 창조하는 일을 의미한다.닉슨이 살아있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한다. 『국가적 과제:클린턴 백악관의 내부』를 쓴 워싱턴 포스트의 보브 우드워드는 자신이 참고한 증거와 인터뷰 자료들을 예일대학 도서관에 보관시키고 40년후 공개토록 했다.미국에서 링컨처럼 역사적 평가가 안정돼 있는 대통령도 드물다.88 년 고어 밴덜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출간됐을 때 NBC-TV는 『고어 반달의 링컨』으로 소개했다.다큐드라마의 수준 역시 그 사회 전체 수준의 어쩔 수 없는 한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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