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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간군인들>1.주남마을 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검찰의 5.18재수사에 때를 맞춰 중앙일보는「가해자」쪽 입장에서 당시를 조명하는 기획을 시도했다.특별취재반은 광주에 파견됐던 3,7,11공수여단및 20사단의 초급장교.사병 100여명을 두달가까이 만났다.그러나 상당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가까스로 20여명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었지만 그나마 한결같이 익명을 요구했다.중앙일보의 취재사실이 당시 공수부대 지휘부에 알려지면서『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압력이 전해졌다고 한다.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주남마을 양민 확인사살등새로운 내용들이 적잖이 취재됐다.「광주의 군인」들은 깊이 반성하고 회한에 젖으면서도 한편으론 일방적 매도라고 억울해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다.
[편집자 註]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공수부대원들이 주남마을 부근에서 생포한 시민을 대검으로 찌르고 확인사살까지 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7공수여단 33대대소속 李모(40.당시 중사),洪모(39.同),또 다른 李모(39.同)씨의 증언이다.〈광주시동구지원동 주남마을 학살사건과 관련,현장에 있던 군인들의 증언이 나오기는 처음이다.공수부대원 최영신(崔 永信.41)씨의 간접증언(88년 국회청문회에서)을 비롯,시민군등피해자측의 주장은 그동안 많았다.〉 두 李씨와 洪씨의 증언은 계속된다.80년 5월23일 오후 1시쯤 주남마을 앞산.17일 밤부터 전남대앞을 지키던 洪씨 등 7공수 부대원들은 도청앞 집단 발포이후 시민군에 밀려 무등산을 넘어 화순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7공수부대로부터 50 떨어진 곳에서는 11공수부대가 주남마을인근 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시민군에게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 도로를 지키고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산등성이 밑으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11공수부대원들이 교련복을 입은 대학생 차림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 2명을 끌고오는 것이 보였습니다.』〈이에 앞서 11공수부대원들은 주남마을 2㎞아래 도로에서 지나가던 버스에 무차별 사격,운전사와 승객 18명중 15명이 사망했다.생존자 3명중 한 명은 부상이 심해 헬리콥터로 병원에 후송되고 이들 2명은 11공수부대원들에게 잡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은 이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무릎을 꿇은 채 사지를 바르르 떨며 공수부대원들에게 「살려달라」고 두손 모아 애원했습니다.』 한 하사관이 나서 이들의 주머니를 뒤졌다.그리고 『카빈(소총)실탄이 있다』고 소리쳤다.지휘하던 한 소령이 신경질적으로 함께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이 새끼들 폭도니까 없애버려.』 『명령을 받은 부대원들은 이들을 인근 소나무로 끌고 가 기대놓고 차고 있던 대검을 꺼내 그들을 한 차례씩찔렀지만 단번에 죽이지 못했습니다.한 남자가 찔린 배를 손으로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어라 말을 하다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습니다.그 순간 한 부대원이 쓰러진 남자의 주머니에서담배를 꺼내 한대 피운뒤 「이새끼들 정말 지독하네」라며 머리에M-16을 2발씩 쏴 사살하고는 소나무 옆 바위밑에 묻어버렸습니다.』 〈주남마을 주민 박학수(朴學洙.73)씨는 『총소리가 난 다음날 전라도 출신이라고 밝힌 소령이 산에서 내려와 「살릴수 있는 놈을 괜히 죽였다」고 중얼거리며 술을 먹고 갔다』고 증언한다.〉 『그들이 「살려달라」며 죽어가는 모습을 봤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제대후 그 상황이 자꾸 떠올라 2년간 술만 마셨습니다.』(39세 李씨) 『아직도 당시를 떠올리면 두손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식은 땀이 나곤 합니다.』(洪씨) 사회부 특별취재반=김태진. 강홍준.김현승.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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