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시신 훼손' 대응 속앓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가 '팔루자 쇼크'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자국민 4명이 살해된 뒤 이라크 군중에 의해 시체가 절단되고 훼손되는 사태가 발생한 지 3일이 지났지만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달래줄 만한 뚜렷한 대응책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1일 "부시 대통령이 방송으로 모든 장면을 직접 봤다"며 '대통령의 관심'을 강조했다. 폴 브레머 이라크 미군정 최고행정관은 "관련자들은 반드시 처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공개된 대응의 전부다.

미 언론에 따르면 팔루자에서 미국인들이 살해될 당시 멀지 않은 곳에 미 해병대 4000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급파되지 않았다. 해병대 마이클 워커 대령은 오히려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간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며 "자칫 폭도들만 자극한다. 스스로 수그러들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미군은 팔루자에 진입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주둔 미군 대변인 마크 키미트 준장은 "성급하게 진입하면 사태가 악화할 수 있다"면서 "팔루자 진입은 신중히 추진하되 반드시 통제권을 재확립하고 평정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자국민 보호'를 외교의 근간으로 앞세워 왔던 미국의 그간 태도와는 다르다.

1993년 10월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반군에 의해 살해된 미 해병 18명의 시체를 주민들이 끌고 다닌 사태가 발생했다. CNN방송이 이를 현지보도하고 이어 다른 TV 방송들이 연일 반복해 방송하면서 여론이 악화하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곧바로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지금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할 수 없다. 이라크의 정치.경제적 이해가 소말리아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는 이번 사태로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키라"는 여론이 또 높아질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이라크는 부시 행정부를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