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부결에도 … ‘리스본조약’ 살아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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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아일랜드의 국민투표 결과는 정치적 현실로 받아들이겠지만 유럽 통합의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니 유럽헌법’으로 불리는 리스본조약이 아일랜드 국민의 반대로 비준이 좌절된 다음 날인 14일(현지시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같이 말문을 열었다. 사르코지는 유럽연합(EU)의 정치적 통합을 마무리 짓기 위해 리스본조약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인물이다.

또 다음 달 유럽이사회 순번제 상임의장에 오르기 때문에 그의 반응에 관심이 모였다. 그는 “우리는 유럽인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통합에 다가가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리스본조약은 계속된다’는 강한 메시지였다.

◇조약 일부 수정 후 재추진 전망=사르코지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려고 나섰다. 영국 등 아직 비준하지 않은 9개국에서 계속 정상적인 비준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조약 비준 부결 이후 영국·체코·폴란드 등 리스본조약에 소극적인 일부 국가에서 비준 무용론이 대두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27개 EU 회원국 중 프랑스 등 18개국에선 비준이 끝났다.

27개 회원국 정상은 지난해 12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모여 새로운 정치적 통합을 선언했다. 이를 기초하는 리스본조약이 파기된다면 각국 정부로서는 새로운 조약 추진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또 완전히 새로운 대안을 내놓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

3년 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된 이후 EU 회원국들은 리스본조약을 만드는 데 2년 이상 걸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리스본조약의 골격을 지키기 위해 적극 나섰다고 일간 르피가로가 14일 보도했다.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이 “리스본조약은 아직 살아 있다”고 즉각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이유다. 유럽의 ‘빅마우스’인 사르코지가 유럽이사회 의장에 오르는 것도 위안거리다. 다음 달 19일 사르코지가 주재하는 첫 EU 정상회의 전에 어떤 형태로든 대안이 마련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리스본조약의 보완 범위와 내용에 대해 회원국들의 의견 조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비준한 18개국에서 새로 비준해야 하는지도 문제다. 또 형식적인 손질에 그칠 경우 다시 비준된다는 보장이 없고, 대폭 수정되면 조약 무용론이 대두될 수 있다는 게 유럽 언론의 지적이다. 회원국들이 쉽사리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 리스본조약을 폐기한 뒤 완전히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일랜드에서 부결된 원인=무엇보다 유럽 통합이란 본질적인 문제보다 아일랜드의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는 게 유럽 언론의 분석이다. BBC는 “아일랜드 국민 상당수가 조약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반대했다”며 정부의 국민 설득 실패를 지적했다.

아일랜드의 여론조사 결과 농민·빈민층 등 소외계층이 무더기로 반대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국민투표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국민투표를 하면 자국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율에 따라 결과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유럽 각국의 특성을 무시하고 추진한 데서 나온 당연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의 반 유럽통합모임 ‘오픈 유럽’ 측은 “오만한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을 상대로 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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