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88. ‘세계인’ 정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에 근무하던 시절의 정아.

2003년 크레이그 윌리엄스와 결혼한 정아는 이제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가 됐다.

정아는 만 다섯 살에 미국으로 온 뒤 중학교 시절 2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한국사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서울 국제학교에서 중·고 과정을 마친 카밀라보다 오히려 한국을 모른다. 카밀라는 그런 인연으로 지금까지 한국인 단짝 친구가 있는데, 정작 정아는 단 한 명도 없다.

정아가 스스로 한국인임을 얼마나 의식하고 살아왔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혼란을 겪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렸을 때는 까만 머리, 동그란 얼굴, 길쭉한 눈매를 놀리는 미국 친구들 때문에 속상해하고 울기도 했다. 동양 사람을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미국 아이들도 어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정아도 친구들도 커가면서 그런 일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정아의 본래 이름은 금주다. 정아 외할아버지가 지은 것이다. 지금도 호적에는 그 이름이 올라 있다. 길옥윤 선생의 본명이 최치정이었으니 정아의 본명도 최금주인 것이다. 그런데 정아가 태어났을 무렵 내 팬 중에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의 사주를 보니 금주보다 정아가 더 좋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정아라는 이름의 느낌이 더 좋은 것 같아 금주 대신 정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아르만도 게디니와 결혼하고, 동생 카밀라가 태어나 두 자매가 함께 세례를 받게 됐다. 파울라(Paula)라는 세례명을 받은 정아는 미국에서 줄곧 파울라 게디니로 불렸다.

정아는 사회에 나가면서부터 ‘정아’라는 한국 이름을 다시 쓰겠다고 했다. 모든 서류에 이름을 ‘정아 게디니’로 고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소보에서 만난 크레이그 윌리엄스와 결혼한 정아는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라는 글로벌 이름을 갖게 됐다.

한국인 엄마, 이탈리아인 아빠, 이탈리아와 한국 혼혈인 동생, 영국인 남편, 그리고 영국과 한국 혼혈인 아들과 딸을 둔 정아. 정아야말로 ‘글로벌 가족’을 이룬 셈이다. 그런 정아에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얼마만큼 의식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정아는 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에 비해 우리 말이 서툰 편이다. 그래도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 말을 잊지 않도록 해준 엄마에게 감사하고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과 문화에 익숙하지만 정아라는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 코소보·르완다 등 분쟁 지역을 거쳐 이제는 남편이 일하고 있는 태국 방콕에서 두 아이를 기르며 살고 있다. 그 나라에 사는 이상 그 나라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며 태국어도 공부하고 있다. 정아는 누구보다 글로벌 의식을 가진 내 자랑스러운 딸이다.

패티 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