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워싱턴의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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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지 부시의 재선 도전을 격파하고 당당히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빌 클린턴은 행사장인 의사당으로 가기에 앞서 먼저 백악관에 들렀다.부시와 함께 취임식장에 가기 위해서다.
『그는 아직 취임선서 전(前)이었다.그때까지도 대통령은 부시였다.그러나 그가 들어서는 순간 부시는 백악관에서 이미 쫓겨난것과 마찬가지였다.그것은 쿠데타의 순간이었다…하지만 행사장으로나란히 향하는 두 지도자에게 사람들은 모두 환 한 웃음을 보냈다.클린턴에게는 희망을 걸었고 부시에게는 사랑을 보내주었다.미움은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건과 부시 두 대통령의 대변인을 역임한 말린 피츠워터가 최근 발간된 회고록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던 날을 회상했다.「워싱턴 쿠데타」는 물론과장표현이었다.이 말은 사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과 시하는 그의 수사(修辭)일 따름이다.
미국의 정권교체가 대체로 이처럼 희망과 사랑속에 이루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지금 서울은 쿠데타의 망령에 발목이 잡혀 허우적거리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12.12담화를 통해 지금 한국이겪고 있는 진통 과정은 「명예혁명」이고 불가피한 「역사 바로세우기」작업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당장 나라와 국민의 체통.체면은 「명예」운운하기에 앞서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비자금.쿠데타등과 관련해 최근 해외언론에 비치는 한국의 일그러진 초상화는 국가적 수모다.요새는 한술 더 떠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등 미국의 권위지가 앞다퉈 서울의 무녀(巫女)얘기까지 지면에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 눈에 과연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진입하고 있는 나라로 비칠지,미개국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로 비칠지 헷갈릴뿐이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세계는 새로운 질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나라와 나라 사이에 치열한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시대가 온것입니다…세계화는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의 중심에 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金대통령 신년사의 한 대목이다.불과 열두달도 안된 일이지만 아련한 추억속에 묻혀진 먼 옛날 얘기 같은 느낌이다.金대통령은 세계화를 핵심 국정과제라고 선언한 것으로도 기억되지만 과연 지금 그 말이 국민에게 얼마나 실감나게인식되고 있을까.
세계화뿐 아니라 다른 국정지표도 두 전대통령문제에 휩쓸려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는 형국이다.지금이야말로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말마따나 「총체적 난국」이다.이런 중대 국면에도 불구하고 金대통령은 그동안 신비감(?)이 들 정도의 침 묵으로 일관해오다 대변인에게 12.12담화문을 낭독시켰다.타국 얘기지만 부시는 재임중 280회 기자회견을 가졌다.월5~6회 꼴이다.
***지도자들 대화필요 국민은 당장도 불안하고 앞날도 초조하다.안절부절못하는 국민에게 지도자들의 침묵은 무책임이다.지도자들은 국민에게 설명하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대화를 가져야 한다.그리고 기왕 정치권의 대화라면 현정국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지도자 대 표간의 진정한 토론만이 문제해결과 국민선무(宣撫)에도움이 될 것이다.
金대통령이 각계 원로등과 개별적으로 나누고 있는 대화도 좋은일이다.그러나 그보다는 껄끄러운 상대지만 정국 실세인 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씨등 정계 대표들과 허심탄회한 대화의 자리가 해가기전에 마련되는 것이 더 시급한게 아 닐까.
(미주 총국장) 한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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