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선거사범은 흥정 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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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요즘 불법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선진국을 꿈꾸는 국민들로서는 격에 맞지도 않고 자존심마저 상하는 일이다. 촛불집회 현장의 불법행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빚어진 선거법 위반 사건 등과 관련한 30여 건의 고소·고발 사건을 일괄 취소·취하하겠다는 한나라당의 방침이 어처구니없어서다. 이에 비하면 촛불집회에서의 일탈행위는 오히려 편법이나 해프닝에 가깝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촛불 현장에서의 쇠파이프 폭력보다 국민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더욱 심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우리 국민은 정치행태와 정치인들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면서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정치적 국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결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한나라당 대표와 원내대표 등은 20대 초반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30년 이상 법률가와 법을 만드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평소 3권분립의 헌법정신을 마음에 두고는 있었는지, 헌법을 제대로 읽어 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 같은 결정에는 정치가 헌법과 법률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제도나 틀보다 우선한다는 오만한 정치우월주의가 담겨 있다. “대승적이고 합리적인 결단”이라며 맞장구치며 반색하는 통합민주당 수뇌부의 모습 또한 볼썽사납기는 매한가지다. ‘대승적’ ‘화합’ ‘합리’ 등의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주장의 범주에 범법행위까지 포함될 수는 없다.

입법부 지도급 인사들의 이런 사고구조에다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는 나라를 법치국가라 할 수 없다. 국민들에게 무슨 낯으로 법을 지키라고 말할 것인가. 자신들이 만든 법안을 국민이 지키지 않을 경우 어떤 입장과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선거가 끝난 뒤 서로 좋게 타협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못된 관행’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촛불집회에 몰려 있는 틈을 타서 은근슬쩍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이끌어 나가는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국법질서를 해치는 발언을 해서는 곤란하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일반인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지도자다. 대선 당시 여야 구분 없이 흑색선거 운동을 반드시 추방하겠다고 다짐은 왜 했는지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랬던 정치인들이 국정난맥 수습과 민생국회 개원이라는 ‘명분’을 개발해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법에 기대어 상대방을 거칠게 비판했던 정치권이 이제는 그 사실 자체를 불문에 부치자고 한다. 유·불리에 따라 법을 이용하는 셈이다.

지난 3월 법원과 검찰은 각각 회의를 열고 불법 선거운동 척결 방침을 대내외에 밝혔다. 온 국민이 박수를 보냈다. 선거법 위반 사범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선출직 자격이 없는 사람이 단 하루라도 의원직을 유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법원과 검찰의 역할이 주목되는 이유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다소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 흑색선전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 여기에 정치인들 스스로 법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등 여건이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대선사범 공소시효가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을 앞세우며 정치를 해왔다. 하지만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행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나서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들이 무시한 법과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법원과 검찰은 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면 그만이고, 시민들은 투표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면 된다. 아무리 급해도 돌아가야 할 길이 있고,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최소한의 직업적인 책임마저 저버리는 정치인들에 대해선 법과 제도, 국민의 심판으로 평가하는 게 옳다.

김우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