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엄상빈과 함께 걷는 길 그리고 삶 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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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주선하다

지난 4월, 강원도 영월군의 사진 박물관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엄상빈이 2005년부터 준비했던 영월 주민들의 이야기가 사진전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마을의 경사를 축하하려는 듯 하늘도 활짝 개어 화창한 날씨를 뽐내는 날이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서있는 박물관. 그곳을 향해 개막식을 축하할 관객들이 봄 햇살을 등에 지고 하나둘씩 오르고 있었다. 여느 개막식 관객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까만 얼굴에 주름진 얼굴, 굵은 손마디가 두드러졌다. 그 표정을 들여다보니 무언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근심이 서린 것도 같아 묘하다. 언덕길을 올라 박물관 앞에 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춤거리며 망설였지만 무심한 박물관은 발아래 펼쳐진 영월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들의 불편한 표정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전시관의 자동문을 열어 보인다. 그제야 주섬주섬 전시실로 들어선 관객들. 그 안에는 아침 일찍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작가가 서 있었다.

엄상빈의 마중을 받자 그제야 긴장된 표정을 풀며 미소 짓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작가에게 특별 초청된 개막식 관객들이요, 전시실 사진 속 주인공들이다. 자신들의 삶이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한 마당에, 번쩍번쩍한 박물관에 그 주인공 자격으로 초청되다니…! 사람들은 한동안 멍한 기분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 오직 작가만이 연신 너털웃음 지으며 분주할 뿐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서먹하던 분위기가 어느 순간 서서히 옅어지더니 드디어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웃고 떠들기 시작하니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씩 긴장을 놓고 미소를 피웠다. 그렇게 잔치분위기가 시작된 거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지난여름 땡볕 아래에서 사진 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다짐했다. 이들의 삶을 글과 사진으로 최대한 진실하게 기록하리라. 그리고 작품을 발표하는 날 그 주인공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리라.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번이고 주인공의 동네를 찾아가고 논두렁길을 헤매고 길을 잃어 난감했던 지난 날. 그런 작가의 마음도 몰라주고 왜 자꾸 귀찮게 하느냐며 타박했던 할머니, 진술이 자꾸 엇갈리는 탓에 또 다른 증인을 찾아 다른 지역까지 가게 만들었던 아주머니들, 임자라도 만난 듯 봇물 터진 이야기를 주체 못했던 아저씨 등등 이들은 이제 말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너무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했고, 굳이 그것을 끄집어내려는 작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사진 앞에 오래 머물렀다. 혹은 가장 귀한 삶 앞에서 머물렀다. 가난의 냄새는 새로울 것도 없고 다양하지도 않다. 돈이 없어서 가짜로 오려 만든 결혼식 사진이며 쓰러져 가는 집을 배경으로 찍은 환갑 사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아이들…. 이 모든 배경이 불과 사오십년 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사람들은 회한에 잠겼다.

그렇다고 온통 누추한 기억뿐인 것은 아니다. 땋은 머리를 단정히 드리운 처녀들의 사진은 흑백이라 그런지 더욱 고와 보인다. 가난도 어째 볼 수 없는 것이 젊은 여자들의 고운 태일까. 무명한복을 입고 있는데도 사진 속 처녀들은 싱그럽고 아름답다. 그 풋풋한 사진 옆에는 칠순 할머니의 사진이 대비 구조로 걸려있다. 한 사람을 놓고, 처녀 적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걸어두고 보니 그 기분이 묘해진 모양이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젊은 날의 한 때를 추억하기 위해 동네 처녀들과 함께 사진관을 찾았다던 어느 할머니. 당신의 눈으로 현재 모습의 사진과 젊은 날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나도 그땐 참 고왔지’ 하신다. 대비된 사진을 보는 기분도 묘하지만 그 아래 부록처럼 딸려 있는 주인공들의 사연은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구한 사연 앞에 선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시울을 붉히며 지나친다. 어느 취재원이 소리 내어 울었다는 사진 앞에 서니 사고로 남편을 잃고 병으로 자식까지 앞서 보낸 한 아주머니의 사연이 적혀 있다. 먹을 것이 없어 나무껍질로 죽을 쒀 먹던 시절이며 전쟁 통에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사연 등 무엇 하나 순탄한 것이 없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 불행했던 시간이 이제는 다 과거라니….

이날 엄상빈은 자꾸만 안절부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표명희 할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진을 내준 것을 후회하고 오지 않으시려나,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표명희 할머니는 눈 밑의 큰 반점 때문에 운명이 바뀌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절반이 푸른 점으로 뒤덮여 있다. 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가난한 남자의 아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친정아버지의 노력은 사실 눈물겨웠다. 딸의 얼굴에서 점을 조금이라도 지워보려고 서울의 병원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거의 탕진할 정도였다. 노력은 허사였다. 할머니의 아픈 사연을 떠올리던 작가가 갑자기 빙그레 웃는다. 할머니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표정의 표명희 할머니. 사진 앞에 서더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편안해진다. 얼굴이 흉해서 남들이 욕하면 어쩌나 몹시 걱정을 했단다. 그런데 막상 전시실에서 본 할머니의 현재 모습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얼굴에 푸른 점이 그대로 있긴 했지만 그것이 할머니의 분홍색 조끼와 마당의 꽃보다 더 두드러지진 않았다. 작가가 남몰래 애쓴 결과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할머니는 마냥 좋아하신다. 엄상빈 작가는 본래 사진을 촬영한 후 인위적으로 별도의 작업을 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번에 그 고집을 버렸다. 표명희 할머니를 위한 작가의 선물이다.

어느 덧 이웃들은 서로 어우러져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이야기 하며 박장대소한다. 골목의 좁은 길들을 헤매며 고생한 에피소드라면 작가를 따를 자가 있을까. 지난 시간을 하나둘씩 꺼내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저 막연히 사진 작업만 했더라면 이 시간이 이토록 눈물겹진 않았을 것이다. 이 날이 눈부셨던 이유는 초상의 주인공들이 그 마음을 열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궁색하고 가슴 아파서 맘 속 깊은 곳에 숨겨 둔 채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이야기. 혹여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들려줬더라도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을 들풀들의 삶. 이것은 영월 땅에 발붙이고 사는 개개인의 역사이자 마을의 변천사요 한 나라의 단편이다. 광산에서 일하다가 장애를 얻은 광부, 오직 땅만 믿고 살아온 농부, 전쟁의 역사를 견뎌낸 관공서와 학교, 시장, 미장원 등 사진 속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삶이자 역사다.

제 아무리 소박한 주제를 전시해놓는다 해도 박물관까지 찾아올 일이 전혀 없던 사람들. 그들이 박물관의 주인공이자 관객이 되어 그 자리를 밝혔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여전히 그들의 삶은 박물관보다는 골목 어귀의 평상, 논밭의 두렁, 대추나무가 있는 마당이겠지만 말이다. (계속)

객원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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