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성을 찾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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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여당의 5.18특별법 제정 방침 발표 이후 쿠데타 관련 당사자는 물론이고 여야 정치권,헌재(憲裁)와 검찰등 사법기관까지 모두 이성(理性)을 잃은 듯 허둥대고 있다.불행하게도 어느곳 하나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고 자신있 게 꼽을 만한곳이 없다.
우선 12.12와 5.18의 주역인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일행이 골목길에 늘어서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이성을 잃은 잘못한 일이다.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뉘우침이 없이 일방적인자기 주장만 외쳤다는 것은 내용의 잘잘못을 떠나 전혀 국민들의뜻을 무시한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수백명의 살상자(殺傷者)를 내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린 사람으로서이 시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국민을 향해 눈을 부릅뜬 자세로 불만부터 털어놓는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全씨는 누구 때문에 지금 온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우며,누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했는지부터 생각한 뒤 행동해야 했다.
이에 대한 검찰의 대응자세도 이성적이지는 못했다.全씨에게 1차 출석요구를 해놓고 있던 상황에서 당일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선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었다.몇차례의 소환절차를 거치는 등 다른 일반사건과 똑같이 처리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全씨가 검찰 수사에 불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 잘못이지만 검찰이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며 발끈해 감정적으로 나선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물론 全씨에게 적용된 죄목(罪目)이 예사롭진 않지만 그렇다고강력사건의 현행범처럼 검거에 나선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심야에 발부받은 구속영장을 미명(未明)의 어둠속에 1,000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가며 서둘러 집행하는 광경은 마치 「죄인은 어명을 받으라」는 식의 조선시대 사극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이를 보고 과연 엄정한 법집행이라고 느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검찰은 특별법이 마련되기 전인데도 특별검사제 도입 주장을 봉쇄하기 위 해 서둘러 12.12사건부터 재수사에 착수했다는 일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할 수 있는가. 이성을 잃기는 헌재도 마찬가지다.상식적으로 있어서는 안될평의(評議)내용의 선고전 외부 누설이 드러났는데도 모두 꿀먹은벙어리들이다.평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소원사건 당사자들의 집단 취하 사태를 빚었고,이로 인해 특별법 제정 강행 등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지 않았는가.헌재의 위상 회복은 물론이고 다시는 이같은 행태의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하루빨리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이야말로 너무 오래 이성을 잃고 있다.오늘날 이처럼사회가 혼란해진 것도 전적으로 정치권의 책임이다.그런데도 정치권은 자성(自省)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갑작스런 5.18특별법 제정 방침도 그렇거니와 개헌추진 방침을 밝혔다가 한나절도 못돼 거둬들인 민자당을 국민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바로 정치권에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판단했기 때문에 검찰이 12.12관련자를 기소유예하고 5.18관련자를 불기소할 수밖에 없었다는 법조계의 지적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또 개헌이 그렇게 쉽게 추진되고 철회될 수 있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지 않는가.
야당이 장외투쟁은 안한다고 거듭 거듭 얘기하다 갑자기 보라매공원 집회를 강행한 것도 이성적 처사라 하기 어렵다.또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 이후 정치권 전체가 방향을 잃고서로 「나살고 너죽이기」의 진흙밭 개싸움격의 극한 대립을 보이는 것이 과연 이성을 가진 집단이 할 일인가.
국민들은 불안하다.어느 한군데 믿고 의지할 곳조차 찾기가 힘들다.나라가 국민들을 신명나게는 못해줄 망정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해서야 되겠는가.모두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을 찾아 바로행동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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