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憲裁책임도 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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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검찰의 5.18관련자 불기소처분에 불복하는 헌법소원사건이 헌재(憲裁)의 선고 하루전날인 29일오후 신청인에 의해 4건 모두 취하됐다.헌재가 「성공한 쿠데타 처벌불가 이론」이나 5.18관련자의 공소시효문제 등 사건 자체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을하지 못하고 각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이로써 5.18특별법 제정문제는 위헌시비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너무도 한심하다.우선 무더기 취하이유가 신청인들이 밝힌대로 「특별법을 제정하기로했으므로 실익이 없어서」라고 순수하게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헌재의 이 사건 평의(評議)내용이 신청인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헌재가 결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선수(先手)를 쳤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이 헌재의 무력화를 위해 손잡 고 나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헌법기관 중 하나다.기능에 따라서는 입법기관적 역할까지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온 국민의 존경을 받아야 할국가기관이 이해관계를 앞세운 정치권에 우롱당하는 현실이 참으로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나 헌재는 이번 사태에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평의나 합의 내용에 대한 보안은 재판부가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겨야 하고,법정에서 선고를 통해 가장 먼저 외부에 알려져야 한다는 것은 초보적인 상식이다.그런데 이 번 사건의 경우 전원재판부의 평의내용이 불과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치권과 보도기관에 공공연하게 알려졌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평의내용을 미리 누설하는 사람은 헌법재판관의 자격이 없다고봐야 한다.그러므로 헌재측은 평의내용을 외부에 알려준 재판관을반드시 찾아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또그것이 헌재의 앞날을 생각하고 같은 사법기관인 법원측에도 좋은본보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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