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의 삶과 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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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예술애호가들의 큰 호응속에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원로 한국화가 천경자(千鏡子)화백의 대규모 개인전 「천경자-꿈과 정한의 세계」에 千화백과 오랜 지인인 시인 고은(高銀.62)씨가찾아왔다.千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가까이서 지켜 본 高씨 특유의 구수한 감상법은 千화백의 삶과 예술혼의 바탕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준다.
[편집자註] 천경자전의 그 방(房)은 항구였다.만선(滿船)의배들이 방금 돌아와 부산항에 닻을 내리고 있는 행운의 항구였다. 어찌 퍼덕이는 생선냄새가 나지 않을 것인가.나에게 시청각보다 차라리 후각이 선행된 것도 그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황금빛 눈동자와 열매같은 코가 달린 여인상들의 그 신비 때문에 시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천경자는 누구인가.그는 그것 밖에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刑)의 예술가다.우리나라에 그가 있어 희로애락의 총천연색이 가능하다고 과장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겪은 단속적인 아픔들은 한 독자적인 예술가에게 불가결한 열량(熱量)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50년대 말이다.전후의 폐허가 아직여기저기 방치돼 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살던 곳은 인왕산 그늘을 배경으로 삼아도 좋은 누하동 재래식 가옥이었다.
그 가옥의 좁은 마루가 화실이었다.그런데 그 마루 한복판 자배기에 몇십마리 뱀이 가득히 우글거리고 있었다.그놈들은 거기에담겨진 채 퍽이나 익숙해졌는지 자배기 안에서만 순하디 순하게 있었다.나는 도망칠까하다가 참았다.
천경자의 뱀그림은 6.25사변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부터 시작돼 그 극사실적인 묘사는 차츰 신화적 혹은 문학적 반추상으로 변모한다.훨씬 뒤의 『사군도(蛇群圖)』의 담대한 구도가 그렇기도 하다.
그는 어떤 고비마다 뱀을 그린다고 하는데 이제는 고대 이집트적인 장식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자,뱀얘기는 그만 하자.
그의 주제는 그의 색채가 오랜 시간을 견뎌내면서 이뤄지는 2차색(二次色)과 돌발적으로 뛰쳐나온 원색의 생생한 조화를 성취하고 있다.그래서 그의 정한(情恨)이나 환상으로서의 실재가 성립되는데는 그 분방한 색의 마법이 크게 기여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색령적(色靈的)인 것만을 말하는데 그럴때마다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그의 형태의 범신론적인 힘이그것이다.
슬픔이나 고독 따위의 인간의 기본적 감성이 한 예술가를 통해이렇게도 커다란 감명(感銘)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그로 하여금 경이(驚異)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다.
나는 60년대초 소주 한잔을 얻어먹고 한시간쯤 모델이 돼준 적이 몇번 있다.그는 내 손도 그렸고,내 육신도 그려 그림 속의 한 부분들을 이루었다.
회화에서의 모델이나 사진의 피사체야말로 그 무렵의 실존주의적정서에도 여간 걸맞지 않은게 아니었다.
그는 유난히 문학쪽과도 혈연적이었다.그에게는 서정주(徐廷柱)에 대한 동질감이나 일본유학시절 이토(伊藤整)로부터 익힌 문예적 교양도 스며있다.거기에 에밀리 브론티나 하야시(林芙美子)의체험적 격정과 방랑과도 관련되고 있다.
아니,그 자신이 화가의 일정한 금기 따위를 깨뜨리고 마치 그자신의 내장 하나하나를 꺼내 던지는 것같은 글도 써왔다.
이런 모든 예술적 요소들이야말로 그의 드넓은 한(恨)의 원야(原野)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52년에 그린 『내가 죽은 뒤』라는 작품에서 「단군의 뼈」와도 같은 굵은 뼈가 화사한 나비의 안내를 받는 배치가 베푸는 처절한 경지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처절성이 그의 무한한 환상과 상징의 주부(呪符)를 활짝피어나게 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시장(市場)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프리카에의 강렬한 애착을 통해 보여주는 자유와 권태,남태평양의 무서운 원색,그밖의 도처에서 발굴해온 박물(博物)의 부분들은 하나의 전생사상(轉生思想)과도 만나고 있다.
언젠가 구중중한 남녘포구 술집 주모의 영(嶺) 넘어가는 육자배기 가락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주모와 무슨 인척이라도되는 것처럼 느낀 바 있거니와 이번 20년만에 만난 「예술적인,너무나 예술적인」화가 천경자가 바로 그 주모의 풍모 그것이었다. 그에게 드물게 북극 오로라가 그려진 것이 있다.그것은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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