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한·미FTA 제동 … 연내 비준 물 건너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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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버락 오바마(사진) 상원의원이 23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을 보류하라고 요구한 것은 처음이다. 올 2월에만 해도 “한·미 간 협정의 기준이 우리의 요구 수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정도였던 오바마의 한·미 FTA 태도가 한층 강경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미 의회에서 한·미 FTA의 비준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가 상·하 양원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은 데다 당내의 다른 지도자들도 공공연히 한·미 FTA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도 최근 오바마와 비슷한 서한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냈다. 한·미 FTA보다 먼저 다뤄야 하는 미·콜롬비아 FTA 비준 동의안 심의를 무기한 보류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한·미 FTA도 반대하고 있다.

물론 미 공화당에선 한·미 FTA 지지 의견이 우세하다. 공화당 전국위원회의 앨릭스 코난트 대변인은 오바마의 서한에 대해 “일종의 순진한 고립주의며, 미국 내의 일자리 창출을 지연시키고 중요 동맹국과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또 “오바마는 미국의 적과도 협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라크에 세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동맹국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 만들기는 거절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여건은 공화당에 불리하다. 우선 부시 행정부에는 시간이 없다. 11월 4일 대선과 총선이 치러지는 만큼 선거운동 기간을 고려하면 늦어도 9월 초엔 비준이 이뤄져야 하는데, 민주당으로선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래서 한·미 FTA 비준 문제는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 의회에서 다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FTA 비준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당선 되더라도 민주당이 11월 의회선거에서 다시 상·하 양원을 장악하면 FTA 비준이 이뤄진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오바마는 23일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한·미 FTA를 “매우 결함있는(badly flawed)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비준 동의안을 의회에 내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오바마의 서한은 이날 부시 대통령이 세계무역주간 기념연설에서 “미국이 한국· 콜롬비아·파나마와 체결한 FTA를 의회가 조속히 비준해야 한다”고 말한 직후 공개됐다. 오마바는 서한에서 “의회의 많은 의원처럼 나는 한·미 FTA를 반대한다”며 “합의문 내용이 미국 공산품과 농산물의 효과적이고, 구속력 있는 (한국)시장에의 접근을 보장하기에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동차 관련 조항이 불공정할 정도로 한국에 유리하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협상한 그대로의 협정을 비준하는 건 한국 수출업체엔 미국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제공하는 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한국)에 대한 우리의 상응하는 시장 접근의 기회는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오바마의 의도는 한국 등과 체결한 FTA를 발효시켜 업적을 남기려는 부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오바마는 FTA로 일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국 노동자의 표를 겨냥하고 있다”며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백인 노동자층에 약하다는 문제가 드러나자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반FTA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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