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대만 '거리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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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臺北)에선 지난 27일 50만명이 총통부 관저 주변에 집결했다. 천수이볜 총통이 지난 20일 총통선거에서 2만9518표(0.22%) 차이로 재선됐지만 승복하지 않는 야당 지지세력이 '샤타이(下台.하야)'를 외치며 총결집한 것이다.

총통 선거는 대만 사회를 둘로 갈라놓았다. 陳총통을 지지하는 대만 본토 출신과 야당 연합의 롄잔 후보를 찍은 반(反)천수이볜 세력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은 세(勢)과시를 위해 대대적인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 28일 陳총통 진영은 '중국 미사일 위협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200만명 규모의 반중(反中)시위를 벌였다. 의도는 뻔했다. 지지 세력을 단단히 묶고 20%의 부동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連후보 측도 질세라 '300만명 시위'로 맞섰다. '정권을 바꿔 대만을 구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길거리 정치'는 이제 대만 정치의 단골 메뉴가 됐다. 지난 19일 총통 피격 사건이 터지던 날 민진당 중앙당사 앞엔 순식간에 20만명이 몰려들어 '아볜(阿扁.陳총통의 애칭)'을 연호하며 6차로 도로를 점거했다. 連후보가 '선거 불복'을 선언한 다음날(21일)엔 총통부 건물은 수십만명의 야당 지지층으로 에워싸였다.

'가두 정치'에 휘말린 민심은 더욱 분열돼 간다. 내 편이 옳고 상대편은 틀렸다는 흑백 논리가 사회 전체를 휩쓴다.

대만은 1996년 처음 총통을 직선으로 뽑았다. 2000년 여야 정권교체에 성공해 한국보다 민주화 속도가 한 걸음 늦은 편이다. 하지만 정치참여 열기는 한국 못지않게 뜨겁다. 홍콩의 외국계 펀드 매니저들은 "대만의 '재검표 정국'이 법보다 시위대의 힘으로 해결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그런 혼란상황이 계속되면 대만에서 투자자금을 빼내겠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양수 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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