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문화·교육 탄탄 … 문제는 오만한 정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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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11면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의 상징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신대륙 랜드마크가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최근 다수의 미국인이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전 세계로 전파한 경제적·정치적 자유가 성과를 이뤄 상대적으로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AP=본사특약

버락 오바마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미국 대선의 유력 주자인 오바마가 빡빡한 유세 일정에도 이동 중 책을 한 권 들고 다니는 게 카메라에 잡혀 21일 뉴욕타임스에 보도됐다. 파리드 자카리아 뉴스위크 편집장이 쓴 『포스트 아메리카 세계』였다.

美 내부에서 쏟아지는 ‘미국 쇠퇴론’

이 책은 상당한 화제를 몰고 왔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이코노미스트·월스트리트저널 등 유력지들이 서평과 관련 기사를 실었다. 뉴스위크 12일자는 책의 요지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워싱턴포스트는 18일 “다른 거인들처럼 미국도 쓰러지고 말 것인가?”라는 기사에서 스페인·네덜란드·영국처럼 미국도 세계의 주도국 위치를 상실할지 모르며, 특히 금융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됐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자카리아에 따르면 옛 소련 패망 후 2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의 독주는 끝났다. 미국의 쇠퇴보다는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부상(the rise of the rest)’ 때문이다. 자카리아는 미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며 나노·바이오기술 등 미래 산업 분야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경제·문화·교육 분야는 아직 탄탄하며 미국이 국제사회의 ‘이사장’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가 문제다. 워싱턴이 무모·오만·태만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고 급부상한 미국 이외의 국가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자카리아의 결론이다.

유력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도 2008년 5·6월호에서 미국의 예전만 못한 위상을 ‘미국은 쇠퇴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 회장의 기고문 제목은 ‘무극(無極)시대:미국의 지배 이후’다. 하스에 따르면 국제체제는 구미 열강의 다극(多極)시대, 미·소 냉전기의 양극(兩極)시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단극(單極)시대를 거쳐 무극(無極)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중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 등이 부상하고 민족국가가 쇠퇴하는 가운데 국제기구·지역기구·비정부기구(NGO) 등이 미국의 지도력을 시험하는 게 무극시대다. 무극시대를 풀어 갈 열쇠는 다자주의며 미국은 지도력을 발휘해 충분히 세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하스의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은 국제 문제나 다른 나라 사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 4일자에서 미국의 당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폈다. “미국은 더 이상 강하지 않다. 누가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릴 것인가? 힐러리는 ‘국가안보 위기 상황이 발생해 오전 3시에 백악관으로 전화가 걸려 온다면 누가 전화를 받아야 하는가’를 대선의 화두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전화 받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번 대선은 미국의 쇠퇴를 국민에게 솔직하게 알리고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을 뽑는 선거가 돼야 한다.”

자카리아나 하스가 미국의 쇠퇴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의 논지는 ‘쇠퇴주의(declinism)’ 전통에 속한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은 주기적으로 제기돼 미국의 각성을 촉구해 왔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이 결국 쇠퇴하고 바통을 건네받은 미국이기에 자신도 권좌에서 물러나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 미국의 쇠퇴가 감지됐을 때 미 학계는 미국의 패권 붕괴가 국제체제에 미칠 영향, 미·일 이중패권(bigemony), 일본이 단독으로 국제사회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 등 여러 가능성을 논의했다. 당시의 대표작인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1987)은 군사적인 과잉팽창(over-stretch)이 쇠퇴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쇠퇴주의 저술의 전통은 뿌리가 깊다. 멀리는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의 『로마 제국 쇠망사』나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의 『서구의 몰락』까지 연결된다.

자카리아와 하스가 제기하는 보다 업그레이드된 ‘쇠퇴론 2.0’은 기존 논의와 다른 점도 발견된다. 우선 80년대의 전망보다 훨씬 낙관적이다. 유럽연합·중국·인도·러시아 등이 부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독으로는 미국을 제압할 수 없다. 이들 중 일부가 연합을 하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연합해 미국에 맞설 이유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일부 분야에서는 1등 자리를 내줬지만 종합적으로 미국은 1등이다. 게다가 나머지 국가들의 부상은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산물이다. 물론 미국은 ‘자신이 거둔 성공의 희생자(victim of one’s own success)’가 될 수도 있지만 ‘정신만 차리면’ 충분히 세계화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인지된다.

앞으로 ‘쇠퇴론 2.0’은 한동안 찬반 논란을 통해 논의가 확산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선과 맞물렸을 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가 주목된다. 특히 “워싱턴이 문제”라는 자카리아의 주장은 오바마나 존 매케인의 정치 개혁 주장과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부시 행정부 기간에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이란 문제로 중국·인도·러시아의 부상, 텃밭인 중남미 지역 문제는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차기 행정부는 산적한 국제 문제 속에서 미국의 위상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오바마가 굳이 『포스트 아메리카 세계』를 들고 다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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