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빠진 맨유 우승’ 모스크바도 비에 젖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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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없었다. 지지부진한 경기로 상대에게 끌려 다닐 때도, 피 말리는 승부차기의 순간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박지성이 22일 새벽(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끝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뛰지 못했다. 선발은커녕 18명 엔트리에도 빠져 벤치에 앉지도 못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출전하는 첫 아시아 선수가 될 거라는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 맨유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라이벌 첼시를 꺾고 우승했다. 전·후반을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6-5로 이겨 1999년 이후 9년 만에 세 번째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이은 ‘더블’ 달성이다.

박지성이 선발 아니면 교체멤버로라도 뛸 것으로 굳게 믿고 오전 3시45분 킥오프를 기다리던 국내 축구팬은 당혹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경기 1시간 전에 발표된 엔트리에서 박지성이 빠졌음을 확인한 이후 인터넷은 맨유와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했다.

퍼거슨 감독은 경기 전날까지도 “박지성에게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는 박지성 대신 오언 하그리브스를 오른쪽 미드필더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왼쪽 미드필더에 배치했다. 경기 후 퍼거슨은 “(박지성을 빼고) 선발 멤버를 짜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하그리브스의 컨디션이 워낙 좋았다”고 박지성을 기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하그리브스라는 ‘깜짝 카드’를 숨기기 위해 박지성을 ‘연막’으로 사용한 셈이다.

그러나 퍼거슨의 용병술은 자충수가 될 뻔했다. 하그리브스는 박지성만큼의 활동량과 찬스를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바람에 맨유는 호날두의 왼쪽 공격에만 의존했고, 특급 도우미 박지성을 잃은 웨인 루니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맨유는 후반 이후 계속 끌려다녔고, 상대 실수에 편승해 행운의 승부차기 승을 거뒀다. 그런데도 영국 축구 전문채널 스카이스포츠는 하그리브스에게 평점을 8점이나 줬고, 맨체스터 시민들은 “하그리브스가 최고 수훈선수 2위”라고 치켜세웠다.

맨유와 퍼거슨에 열광하던 국내 축구팬은 ‘박지성이 빠진 맨유의 우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맨유가 더 이상 ‘우리 팀’이 아니고, 퍼거슨이 더 이상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님을 알게 됐다. 영국 언론이 지적했듯이 퍼거슨은 냉혈한 승부사일 뿐이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내칠 수 있음이 확인됐다. 2007∼2008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남의 나라 클럽에 대한 환상을 깨고, 축구를 그 자체로 즐겨야 한다는 아픈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모스크바=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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