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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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성덕왕(聖德王) 20년(721년)하슬라도(何瑟羅道)의 장정 2천명을 동원,북쪽 국경에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흔히 「아슬라」라 불린 하슬라도는 강릉.명주군등 요즘의 강원도 일대를 가리켰다.
중국의 북동부와 연해주(沿海州),한반도 북부에 걸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발해(渤海)에 대비키 위해서였을 것이다.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한 것도 이즈음의 일일까. 고구려 멸망 30년 후인 699년 「고구려 계승국」임을 내세워 건국한 발해가 일본과 국교를 튼 것은 727년.「고구려 국왕」의 이름으로 당시의 일본왕 성무(聖武)에게 국서를 보내고 있다.
발해와 일본이 연대하여 쳐들어오면 신라는 변을 면키 어렵다.
하슬라에 장성을 쌓기 시작한 이듬해 신라는 경주의 남동쪽 외곽에다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신라의 방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군은 병선(兵船) 3백척을동원,동해로 습격해 온다.731년의 일이다.
이와 때를 맞추기나 한듯 732년에 발해는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친다.당은 신라에 발해 정벌을 요청하나 일단 출정한 신라 병사들은 눈이 많이 와 싸우지 못한다며 되돌아와버렸다.
이같이 신라 동해안과 북방 일대에 전쟁의 긴장감이 한껏 일고있을 무렵 순정공은 당대 최고의 미인 아내를 데리고 임지로 부임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수로부인을 납치해간 바다의 「용」은 일본을 내왕하던발해국 사절단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다.
청진(淸津)과 일본의 동해쪽 해안 쓰루가(敦賀)항을 잇는 바닷길은 예부터 고구려와 왜 사이의 항로(航路)였다.
8세기 이후의 일본사를 서술해 놓은 『속일본기(續日本紀)』에의하면 발해는 727년부터 해마다 사절단을 일본 조정에 보냈고,일본왕은 사절단의 수령 고제덕(高齊德)에게 비단 등 후한 선물을 바치곤 했었다.
순정공은 수로부인을 납치해간 용을 향해 마을사람더러 『거북아거북아…』라 부르게 했다.한자로 『구호(龜乎) 구호(龜乎)…』다. 고구려는 「구려(句麗)」라고도 불렸다.「구(龜)」는 「구(句)」와 통한다.「거북」은 어쩌면 「고구려」를 가리킨 상징적낱말인지도 모른다고 서여사는 추리했다.수로부인을 납치해간 용은고구려 후신인 발해의 고제덕 사절단장이었을 가능성 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해가(海歌)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해가와 흡사한 구지가는 가락국,즉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김수로왕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강림했을 때 그곳 백성들로하여금 부르게 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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