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盧씨는 회개.고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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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정치에 있어 통치자금은 지배권력의 생명선이자 온갖 비리를조장하는 부패문화의 원천이었다.지배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이 엄청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부패와의 타협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6공(共)까지 한국의 모든 집권자는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른바 결손지도자였고 그 결과 이들은 권위에 의한 지배보다 검은 돈에 의한 지배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정치자금을 긁 어모으는 일에 탐닉했고,겉으로는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뒤로는 검은 돈을 챙기는 이중적 위선을 서슴없이 자행했다.그리하여 한국의 대통령직은 부패문화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정치부패의 역사였고,그 중심에는 항상 최고권력자가 도사리고 있었다.예컨대 제1공화국이 무너진 것은 자유당 정권이 부패했기 때문이었다.당시의 지배권력은검은 돈을 뿌리면서 요정정치와 부정선거를 자행했 고 그 주요 소스는 대충자금(對充資金)이었다.
3,4공화국 박정희(朴正熙)정권도 각종 명목으로 거둬들인 검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활용함으로써 장기집권을 누릴 수 있었고,이 때의 주요 소스는 외국차관이었다.5,6공에 이르자 자금소스는 국내시장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규모도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났으며 수법 또한 더욱 대담해졌다.4공까지의 통치권자는 퇴임후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지만 5,6공 집권자는 퇴임후까지 내다보면서 기업및 브로커와의 암거래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자금을 긁어모으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불거져나온 것이 4,000억원 비자금설(說)이요,485억원 차명계좌 사건이다.사실 6공정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율곡사업.동화은행 비자금.경부고속철도사업.영종도 신공항건설.상무대 건설,그리고 130여개 골프장 무더기인가 등과 관련한 의혹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아왔다.그러던 터에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통치자금 명목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폭로됨으로써설마하던 의구심은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기회있을 때마다 깨끗한 정치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했을 뿐만아니라 4,000억원 비자금 발설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것처럼 펄쩍 뛰던 그가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자금으로사용했다는 이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 국민은 이래도 되는가 하는 비난과 함께 깊은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다.이러한 국민의 실망과 아픔을 치유하고 한국정치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비자금에 관한 모든 진상을 한점 의혹도 남기지 말고 속속들이 밝혀내야 한다.
비자금의 불법조성 사실이 공개된 이상 이 사건은 이제 해명성수사나 측근인사의 처벌만으로 적당히 덮어 넘길 수 없게 됐다.
그렇게 될 경우 전직대통령들에 대한 불신은 말할 것도 없고 현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의혹 또한 확산될 것이며 개혁작업도 유명무실 해질 게 뻔하다.
***속속들이 밝혀내야 따라서 필요하다면 노 전대통령을 구속해서라도 통치자금의 규모.조성경위.사용내용 등을 철저하게 규명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검찰조사를 받기 전에 노 전대통령은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심정으로 국민 앞에 직접 나서 양심고백을 하고 전직대통령으로서의 명예를 어느 정도 되찾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부패문화의 청산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노 전대통령의 말처럼 잘못된 돈은 법에 의해서나 국민의 뜻에의해 마땅히 엄정하게 다스려져야 할 것이다.
(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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