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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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제2부 수로부인(水路夫人)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 97 정길례여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아리영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전시장에서 그녀가 졸도했다는 사실이다.
『근처 병원에서 치료받고 집으로 가셨다.우리 차로 모셔다 드리고 왔어.』 『어디가 편찮으신 거예요?』 『병원 의사 얘기로는 몹시 쇠약해져 있으시대.』 『종가댁 아기 키운다고 하시던데피곤이 쌓이신 거 아닐까요?』 아버지는 납덩이라도 삼킨듯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정여사 사이도 끝나려는가.아리영은 자신이 실연(失戀)한 것처럼 괴로웠다.
노년의 사랑이 측은했다.젊은 날의 사랑보다 더욱 순수하고 간절하여 어쩌면 생명 바로 그것일 수 있는 사랑.하얀 재 속에서오래도록 투명한 빛으로 머물러 있는 불씨와도 같은 사랑이다.
아버지는 이제 정여사 이외의 어떤 여성과도 관계를 갖지 못할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애달픈 것.이렇게 외곬인 것.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자기 주장」인가,아니면 「자기 포기」인가.
마음이 마냥 어수선한대로 서을희여사를 찾았다.외할아버지 소장의 고미술품 목록 출판 일도 있었으나 서여사를 만나면 늘 용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옛그릇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도록겸 읽을거리 책자를펴내자고 서여사는 제안했다.가야.신라 등 토기 중심의 외할아버지 소장품을 소개하며 우리나라 옛그릇에 대한 해설도 곁들이는 책이라 한다.
A대학의 고고(考古)미술학 교수에게 해설을 맡겼으면 한다고도했다. A대학이라면 미스터 조가 나가는 대학이다.별 상관은 없으나 공교롭게 그와의 얽힘이 잇따라 생기는 듯하여 얄궂었다.20년간 내내 소식이 없다가 한번 맞닥뜨리니까 계속 이어질 기미가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정여사네 잔칫날 밤 이후로 단둘이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단둘이서 다시 만나면 순식간에 20년 전의 관계로 되돌아가버릴 것같아 두려웠다.나선생을 끌어들인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방패막이었는지 모른다.
서여사의 한옥 사무실은 매운듯 향긋했다.안방 한구석의 큼직한조선조 백자 항아리에 해당화(海棠花)가 가득히 꽂혀 있었다.
『어머나,참 아름다워요!』 아리영은 뒤늦게 탄성을 올렸다.
다섯장의 진분홍 꽃잎과 샛노란 꽃심이 눈부시도록 연연(娟娟)하다.해당화도 곱지만 청화백자대호(靑華白瓷大壺)도 일품(逸品)이다. 『미국서 돌아온 큰아이 선물이에요.』 서여사가 꽃과 항아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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