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덤벼라, 난 가족을 위해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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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향은 시각효과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형광색에 가까운 원색의 향연이 어찌나 요란한지, 혹 나이든 관객 중에는 눈이 시큰할 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량의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는 ‘트랜스포머’ 같은 지난해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봤던 바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그 맛이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자동차 경주 역시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아니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의 경계에 자리하는 영화다. 주인공(에밀 허시)은 이름이 ‘스피드’요, 성은 ‘레이서’이니 자동차 선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뛰어난 선수였던 형이 승부 조작에 연루됐다는 오명을 쓰고 사고로 숨진 뒤, 스피드는 어린 시절 형을 존경하던 마음 그대로 자신도 선수가 된다.


이 영화의 악역은 자동차 대기업들이다. 경주의 승리는 자동차 회사의 주가를 올리는 탁월한 호재로 작용하고, 이 때문에 실은 몇몇 회사가 승부를 조종해 왔다는 내막이다. 이런 사정을 알기도 전에, 주인공 스피드는 후원자가 되겠다며 찾아온 대기업 사장의 어마어마한 제안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 아버지(존 굿맨)의 소규모 자동차 제작사를, 자애로운 어머니(수전 서랜던)와 귀여운 여자친구(크리스티나 리치)와 장난꾸러기 어린 동생으로 이뤄진 가족의 정겨움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가족주의다. 스피드는 돈 대신 가족을 선택하고, 대기업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승부 조작을 파헤치려는 정체 불명의 선수 레이서X(매튜 폭스), 스피드네처럼 자동차 회사가 가업이고 이를 위기에서 구해내야 할 처지인 또 다른 선수 태조(정지훈)와 팀을 이뤄 스피드는 위험하기로 이름난 랠리, 형이 숨졌던 바로 그 경주에 출전한다.

워쇼스키 형제는 이야기꾼으로서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줘야 할 대목을 잊지 않는다. 스피드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경주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초반부는 편집의 흐름이 특히 빼어나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이야기는 꽤나 단순하고 그 무게 역시 갈수록 가벼워진다. 실사와 CG의 관계를 중력에 비유한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 유영을 택한 경우다. 그 우주는, 어린 시절 원작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 이제는 어른이 된 세대가 아니라 TV 채널을 돌리는 것만큼이나 비디오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익숙한 어린 세대에 더 친숙할 분위기다.

한국 관객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서비스라면, 정지훈이 할리우드 첫 영화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제 몫을 한다는 점이다. god의 박준형도 대사는 없되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되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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